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라는 더 큰 실재를 믿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을 초월하는 영적인 나라였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구속을 목적으로 하며, 이 세상 가운데서 궁극적이고 영원한 선을 위한 세력으로 존재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나라가 감추어져 있어서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고 고백했다. 물론 예수님의 오심으로 완성될 인류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우리는 이 믿음을 알고 형성할 수 있다. 하지만 감추어진 것은 언젠가 영광스럽게 드러나고, 하나님이 이 모든 창조 질서를 자비와 정의로 다스리실 것이다. 제3의 길은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체제 전복적이면서도 평화로운 저항 운동 같았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열심당원처럼 폭력적인 혁명 전략을 따르기보다는, 하나님 나라 운동원으로서 그 문화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길, 곧 예수님의 길을 열망했다. 이들은 황제를 위해 기도했지만, 그를 섬기기는 거부했다.
--- 「1장. 과거와 현재」 중에서
무대와 소품, 등장인물은 같지만 대본은 둘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만 하나님의 도성 이야기를 들려주는 두 번째 대본을 알고 따르는데, 이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일하고 계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들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뿐, 구속 이야기에서 맡은 역할이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인구조사를 명령했다. 이 결정이 베들레헴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하게 되는 일련의 사건을 일으킨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믿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인간 역사에 자신을 드러내기로 작정하셨다. 이 이야기는 족장들과 요셉, 모세와 여호수아, 사사들과 룻, 왕들과 에스더로 이어졌다. 예수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이 이야기를 성취하려고 오셨다.
--- 「3장. 성취」 중에서
하지만 하나님이 인류에게 먼저 자신을 알려 주신다면 어떨까? 이것이 바로 성육신이라는 선물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기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본다. 하지만 그레고리우스는 궁금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있는 모습 그대로의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배우는가?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연합과 구분을 모두 발견하게 된다. 한 분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그렇게 드러내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로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자는 영원으로부터, 영원을 통해, 영원 가운데 성부에게서 ‘나셨다.’ 성령은 영원으로부터, 영원을 통해, 영원 가운데 성부에게서 ‘비롯되셨다.’ 하나님은 시간에 매이지 않으신다. 하나님 안에는 되어 가는 것이 없고 존재만이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성부, 성자, 성령 한 하나님이셨고, 앞으로도 언제나 한 분 하나님일 것이다. 셋은 구별되는 위격이지만 같은 실체 가운데 완벽하게, 영원히 연합되어 계시므로 모든 일(예: 창조와 구속)을 함께 하신다.
--- 「4장. 지도」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문화, 최소한 로마의 정의에 따른 새 ‘문화’─언어, 복장, 음식, 관습, 의례, 의식, 예술, 건축 등의 확연한 특징으로 나타나는─를 도입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나라나 언어, 관습 등에서 나머지 인류와 구별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의상을 입거나, ‘기독교’ 상점에서 물건을 사거나, ‘기독교’ 언어를 사용하거나, ‘기독교’ 예배 장소를 짓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영향력을 미쳤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건물을 세우지 않고, 베드로의 표현대로 자신들이 ‘산 돌’(벧전 2:5)이 되려 했다. 이방 신전을 찾아 향을 피우지 않고,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를 내뿜기를 소망했다. 로마인들과 달리 (최소한 이 초기만큼은) 하나님 형상을 그리지 않고, 삶의 방식으로 하나님 형상을 드러내려 애썼다(벧전 2:21).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범주를 초월하는 정체성을 형성했다. 다른 사람들과 공통점이 많은데도 여전히 달랐다. “이들은 자기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산다. 시민으로서 모든 것을 공유하고, 외국인으로서 모든 것을 견딘다. 모든 외국 땅이 이들의 조국이지만, 모든 조국이 이들에게는 외국 땅이다.”
--- 「6장. 정체성과 공동체」 중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인 행위를 예배에서 먼저 실천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로마 세계에서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더 힘든 과제에 대비할 수 있었다. 기부가 좋은 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십일조의 기준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성도에게 측정 가능한─법규를 엄격히 강조하는─기준을 부과하지 않고 자유와 청지기 정신을 강조했다. 예배는 사람들에게 나눌 기회를 제공했지만, 지도자들은 절대로 헌금을 요구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믿음으로, 자유로이 드릴 수 있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에게는 일종의 헌금함이 있지만, 기독교가 마치 정해진 요금이 붙은 종교라도 되는 양 공식 수수료를 받기 위한 용도는 아니다. 각 사람은 매달 정해진 날이나 자신이 택한 날에, 자신이 선택한 경우에만, 할 수 있는 경우에만 소액을 드린다. 아무에게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 헌금은 자발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 「7장. 예배」 중에서
기독교 신앙은 사람들의 삶에서 실천적 차이를 만들어 내어,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도 희망을 주고 사람들에게 괴로워하는 이들을 섬기도록 요청했다. 대체로 그리스도인들은 용기 있게 전염병에 맞서 환자들을 간호하고 죽은 자들을 매장해 주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자신을 사랑해 주셨기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이번에도, 최소한 그리스도인 관찰자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과 로마인의 대조가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키프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돌본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 편 사람들만 필요한 사랑의 관심을 받는다면 놀라울 게 없다. 선으로 악을 갚고 신과 같은 관용을 베풀며 원수를 사랑하는 것처럼, 세리나 이교도보다는 낫게 행동할 때에야 비로소 사람은 완벽해질 수 있다”라고 선언했다.
--- 「8장. 세상 속의 삶」 중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초기 기독교 이야기가 그 사실을 일깨워 준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그나티오스가 되고자 했던 ‘진짜 제자들’?이 우리 앞서 있었다. 이들은 기독교의 진리와 복음의 능력, 제자도라는 고차원의 부르심을 증거했다. 이들은 수 세기를 가로질러, 제자의 삶을 인정하거나 보상해 주지 않는 문화에서 주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로 사는 것이 과거처럼 지금도 가능하다고 우리에게 말해 준다. 2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 곧 그분의 성육신과 삶, 죽음, 부활, 승천이 세상을 뒤흔들어 놓은 운동을 일으켰다. 그분은 오늘날에도 동일한 주님이시다. 그 운동은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 「결론. 현재와 과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