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굳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 그것은 철학의 근본적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 외에 세계가 3차원인지 아닌지, 이성(理性)의 범주가 아홉 개인지 열두 개인지의 문제는 그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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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무대 장치가 와르르 무너지는 경우가 닥친다. 아침에 일어나기, 전차로 출근하기, 사무실이나 공장에서의 네 시간 근무, 식사, 전차, 네 시간 근무, 식사, 잠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이러한 일정은 대부분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고, 놀라움이 동반된 이 무기력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시작된다〉라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무기력은 기계적인 삶의 행위들 끝에 느껴지는 것이지만, 이것은 동시에 의식도 작동시킨다. 이 무기력이 의식을 일깨우고, 그다음 상황을 촉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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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단계 더 내려가면 나타나는 것이 바로 낯섦이다. 즉 세상이 〈두껍다〉는 것을 알아채고, 하나의 돌멩이가 얼마나 낯설 수 있고 우리와 얼마나 화해 불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자연이, 하나의 풍경이 얼마나 완강하게 우리를 부정할 수 있는지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아름다움의 밑바닥에 뭔가 비인간적인 것이 자리 잡게 되고, 저기 보이는 언덕들, 온화한 하늘, 그림 같은 나무들은 우리가 거기에 입혀 놓은 신기루 같은 의미들을 순식간에 잃어버리면서 그때부터는 실낙원보다 더 까마득히 멀어져 간다. 세계의 이 원초적인 적의(敵意)가 수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우리를 찾아온다. 세계는 한동안 우리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수 세기 동안 우리는 우리가 세계에 미리 부여해 놓은 윤곽과 형태들만을 이해해 왔으며, 이제부터는 우리가 그 인위적 책략을 이용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우리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씌워 놓았던 가면을 벗은그 무대 장치들은 원래의 자기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우리로부터 멀어져 간다.
--- p.30
한 인간에게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켜, 거기에 인간의 낙인을 찍는 일이다. 고양이의 세계는 개미의 세계가 아니다. 〈모든 사고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자명한 이치가 바로 그런 의미이다.
--- p.33~34
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의식이면서 동시에 죽음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에 자살을 피해 간다. 부조리는 사형수의 마지막 생각의 맨 끝에서, 현기증이 날 것 같은 자신의 추락 일보 직전에도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오는 저 구두끈 같은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자살자의 반대말은 사형수이다.
--- p.84
그렇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목적이다. 그것도 유일한 목적이다. 그가 무엇인가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 삶 속에서의 염원이다. 이제 나는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정복자들은 이따금 정복과 극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 정복자들은 가장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이 하고자 할 때 인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혁명의 영혼 속 가장 뜨거운 곳으로 잠겨 들어가며, 인간의 도가니를 절대 떠나지 않는다.
--- p.136
창조한다는 것, 그것은 두 번 사는 것이다. 프루스트 같은 사람이 불안 속에서도 더듬거리며 모색해 가는 것, 꽃과 각종 태피스트리, 불안과 번민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수집해 나가는 것도 이와 의미가 다르지 않다. (……) 그들은 모두 모방하고, 반복하고, 그들 자신의 것인 현실을 재창조하려고 애쓰고 있다.
--- p.148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가 아래로 되돌아가는 그 시간, 그 짧은 휴식 시간 동안이다. 그토록 바위에 바짝 붙어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이다! 무겁지만 일정한 발걸음으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고통을 향해 다시 걸어 내려가는 그 남자가 보인다. 호흡과도 같고, 그의 불행만큼이나 분명하게 되풀이되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 정상을 떠나 신들의 누추한 소굴을 향해 조금씩 빠져 들어가는 이 순간순간, 그는 그의 운명보다 우위에 있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 p.187~188
오이디푸스는 〈나는 모든 것이 다 잘되었다고 판단한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신성하다. 이 말은 인간의 저 길들여지지 않고 한계가 정해져 있는 세계 속에 울려 퍼진다. 이 말은 모든 것이 다 소진되지는 않으며, 소진되지도 않았음을 가르쳐 준다. 이 말은 불필요한 고통을 원하며 만족을 모른 채 이 세상에 들어왔던 신을 세상 밖으로 몰아낸다. 또 운명을 인간의 문제로, 인간들끼리 조율해야 하는 문제로 만들어 버린다.
시지프의 말 없는 모든 기쁨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고, 그의 바위도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그의 고통을 조용히 바라보면 모든 우상은 입을 다물게 된다. 느닷없이 자기 침묵으로 되돌아간 세계 속에서, 이 땅의 수많은 목소리, 경탄에 마지않는 작은 목소리들이 수없이 솟아난다.
--- pp.189~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