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 대왕은 권위와 권력, 그리고 상업의 중심지였던 성문의 전통적 기능을 그리스, 로마 문화와 결합해서 강화했다. 헤롯은 여러 도시를 건설하면서 로마인이 포룸(forum)이라고 부르는 그리스식 대중 공간 아고라(agora)를 본격적으로 끌어들였다. 아고라는 아크로폴리스와 마찬가지로 고대 폴리스의 중심지였고, 그것을 로마식으로 변형한 포룸 역시 문화적으로 아주 다채로운 공공의 광장이었다. 아고라는 시장이면서 정치와 철학과 종교를 주제로 한 토론의 장이었고, 축제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시민의 관심을 사로잡는 일이 가능한 공간이었다. 아테네와 코린토스(고린도)의 아고라는 선교에 나선 사도 바울에게도 익숙했다. 로마는 제국 도처에 포룸을 설치했다. 헤롯은 아버지 안티파트로스 1세(Antipatros, ?-BC 43) 덕분에 그리스, 로마 문화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테네에 거액의 기부금을 희사해서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에 새겨진 명문에 황제와 로마인의 친구로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도 했었다. 예루살렘 성전 주위에는 신구약 중간기에 등장한 하스몬 왕조가 도입한 아고라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후로 헤롯 대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개축하는 과정에서 기능을 확대한 아고라에서 바리새인들은 한가롭게 거닐며 인사를 주고받았고(마 23:7), 일용직 노동자들은 자신에게 일감을 안겨줄 수 있는 농장 주인을 애타게 기다렸으며(마 23:2-3), 어린이들은 놀이터 삼아서 뛰어다녔다(마 11:16).”
--- p.36, 「1세기의 시장 보기」 중에서
“로마인도 샌들을 즐겨 신었는데, 흙과 먼지를 집안에 들이지 않으려고 실내용과 실외용으로 구분해서 신었다. 집 밖을 나다닐 때는 발을 모두 덮는 샌들, 귀가한 뒤에는 가벼운 실내용 끈 샌들로 갈아 신었다. 그리고 성경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여자가 신발을 신는 행위는 단지 편리함이나 위생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발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1세기 당시 로마 여성은 샌들을 신고 외출하면 긴 튜닉(스톨라) 사이로 발이 드러나지 않게 걸으려고 노력했다. 중세에도 그랬지만 로마에서는 여성이 맨발을 노출하는 행위를 이성에게 강력하게 어필하는 성적 코드(sexual code)로 간주했다. 만일 어떤 여성이 남들 앞에서 길이가 짧은 옷을 입는다든지, 그래서 맨발이 드러나면 행실이 나쁘다는 뒷말을 들을뿐더러 심하면 매춘부나 노예로 오인될 수 있었다.”
--- p.71, 「위험한 여성용 신발」 중에서
“장신구 가운데는 코걸이도 있었다. 아브라함의 종은 장차 주인집 며느리가 될 리브가에게 팔찌 한 쌍과 금으로 만든 코걸이 하나를 건넸다(창 24:22). 코걸이는 우리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착용한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성경에는 자주 언급된다(삿 8:24, 잠 11:22, 호 2:13). 성경시대 여인들이 아름다움을 위해서 코걸이를 착용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왼쪽 콧구멍의 중심 부분을 뚫어 착용하는 코걸이는 대개 상아나 귀금속으로 만들었다. 직경이 6cm가 넘어서 입술에 닿는 것은 예사였다. 코걸이는 장신구뿐 아니라 다른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남편이 코걸이를 통해 아내와 입을 맞추는 오랜 풍습이 있었다. 원정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면서 선두에서 행진하는 정복자들은 포로를 줄지어 끌고 갈 때 코걸이를 마치 갈고리나 코뚜레처럼 사용했다(왕하 19:28). 후자는 대체로 짐승에게나 하는 일이라서 포로가 된 패배자들에게 고통은 물론이고 말할 수 없는 수치를 안겨주었다.”
--- p.124, 「리브가의 코걸이」 중에서
“지붕은 동시에 종교생활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붕에 우상을 섬기는 제단을 쌓고 제사를 바친 때가 있었다. 남북왕조 시대에 유다 임금을 지낸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추진하면서 선왕들이 이방 신에게 제사하려고 지붕에 설치한 제단을 모두 헐어버렸다. ‘…다락 지붕에 세운… 제단들을 왕이 다 헐고 거기서 빻아 내려서 그것들의 가루를 기드론 시내에 쏟아 버리고’(왕하 23:12) 예언자 예레미야 역시 지붕에서 이방 신에게 분향하고 잔을 바치던 왕족과 귀족의 그릇된 행동을 강력히 비난했다(렘 19:13). 이렇게 볼 때 요시야와 예레미야에게는 지붕이라는 공간이 강력한 종교전쟁을 수행하는 일종의 전장이었다. 반면에 베드로에게는 지붕이 경건을 실천하는 장소였다. 베드로는 지중해를 마주한 야포(Yafo,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면서 지붕에 올라가 기도했다. 그러다가 무아경 속에서 환상을 보았다(행 10:9). 베드로처럼 지붕에서 기도 시간을 갖는 것은 당시에는 아주 흔한 일이었다.”
--- p.157, 「다용도실, 지붕」 중에서
“성경시대 사람들은 어째서 이렇게 출산에 집착한 것일까? 물론 일차적으로는 혈통을 잇는 게 주 관심사였다. 하지만 대를 잇는 것 이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성경 시대에는 요즘과 달리 사회적으로 노후를 위한 대비책이 일절 없었다. 오직 자식만이 부모의 미래, 앞날을 도맡아 책임질 자산이었다. 노인들의 생계를 떠맡고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일은 모두 자식의 몫이었다. 그러니 건강한 자녀를 낳는 것은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축복이었다.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시 127:3-5). 성경시대의 결혼은 재산의 보존과도 관계가 깊었다. 결혼을 매개로 유산이 전달되다 보니 당연히 가족이나 동족과의 혼인이 장려되었다. 개인의 선택과 결혼은 무관했다. 가족끼리 대표자를 세우고 둘의 합의대로 계약을 맺는 게 결혼의 핵심이었다. 그에 따른 결과는 두 가족의 단단한 결속과 번영이었다. 이삭의 맏아들 에서처럼 동족을 벗어난 결혼(족외혼, exogamy)은 불순했다(창 26:34). 가족의 이익을 보장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p.226, 「연애, 또는 중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