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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

거리에 핀 시 한 송이 글 한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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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0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464쪽 | 614g | 148*210*30mm
ISBN13 9788964361832
ISBN10 896436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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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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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봄에서 여름으로 막 넘어가기 시작한 5월. 나는 스물아홉이었다. 일단 단골집 고물상 주인에게 이것저것 도움을 받았다. 잠잘 침낭과, 고물하다 보면 꼭 필요한 가위, 드라이버, 자석 등을 얻을 수 있었다. 자석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왜냐하면 구리와 철의 가격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구리가 철보다 더 비쌌다. 그래서 구리인지 철인지 구별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자석을 댔을 때 붙으면 철이고, 안 붙으면 구리다. 리어카를 끌고 가는사람을 가만 보면 대개 양쪽으로 포대기 하나씩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한쪽은 구리 포대기, 다른 한쪽은 철 포대기. 철 포대기 쪽에는 으레 자석이걸려 있었다. 준비는 끝났다. 주머니엔 60만 원. 나는 내처 부산으로 향했다. 그렇게 리어카 행군이 시작됐다. (중략)

리어카를 끌고 또 길을 갔다. 조치원에서 청주로, 거기서 대전으로 돌아서 부산으로. 계획이 그래서가 아니라 길이 그렇게 이어져서 그 길로 갔다. 리어카를 끌면서 나는 내 지난날도 끌고 있었다. 이혼한 와이프가 생각났다. 처음엔 같이 그림을 그리다가 만났다. 와이프는 병이 하나 있었는데, 긁는 병, 카드를 긁는 병이었다. 하지만 정작 헤어진 건 다른 것 때문이었다. 어느 날인가 아끼던 후배와 와이프가 압구정동 카페에서 만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 와이프는 전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다. 그저 만날 수도 있는 일이라 나도 그러려니 하고 믿고 넘어갔는데, 전혀 아무 사이도 아닌 게 아니었다. 두 번째 걸렸을 때는 나한테 배 째라는 식이었다. 결국 이혼 수순을 밟았다. 혼인신고를 한 것도 아니어서 헤어지면 그대로 끝이었다. 아끼던 후배도, 와이프도 그렇게 잃었다. 그 뒤로 사람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림을 같이하던 이들이라, 그쪽 일로 만나는 사람들과도 모두 연락을 끊었다.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신 후였고, 나는 서울역을 전전하며 그냥저냥 되는 대로 살기 시작했다. 파지를 줍기 시작한 것도 그 이후였다.

리어카가 무거워졌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날씨도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서울역에서 길을 내어 쭉 남으로 남으로 내려온 지 벌써 한 달 반이 지나 6월의 가장 뜨거운 때로 진입하고 있을 때, 드디어 부산에 도착했다. 해운대였다. 파도가 밀려오고 백사장엔 피서객들이 또 가족들이, 연인들이 바글바글했다.
--- p.122~125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것이 죽을 장소를 찾아 서울에서 부산까지 여행을 했다는 것이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자살여행’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부산에까지 갔는데도 제대로 단번에 죽을 만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 몇 날을 부산에서 머무르다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가 제주행 배를 탄 다음 중간쯤에서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즉시 부둣가로 가서 배를 탔다. 미리 싸구려 양주 한 병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주 두어 잔에 흐물흐물해지는 주제에 양주를 반병이나 들이마셨는데도 취기가 안 오른다.

모든 사람이 잠드는 자정이 지났을 무렵, 배 난간에 매달렸다. 손만 놓으면 바로 바다로 떨어지고, 배는 멀어질 것이어서 도저히 살아날 방법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이놈의 손가락이 안 펴졌다. 이제껏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치며 정신만 더욱더 맑아졌다. 다시 갑판으로 올라와서 서너 모금 더 마시고 재시도하기를 대여섯 번쯤 하고는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양주를 한 병씩이나 마셨는데도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아침에 제주항에 도착해 어제 내가 매달린 자리를 보니 내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 있었다. 배에서 내리는데 직원들이 사람 머릿수를 헤아리고 있었다. 속으로 픽 웃음이 나왔다. 그들도 내 발자국을 보고 혹시나 불상사가 있지나 않았을까 속깨나 태웠으리라 짐작해본다.

대합실에서 TV를 보는데 설악산 등반 도중 조난 사고를 당한 대학생 몇 명이 동사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아하, 이거구나. 나도 저걸 따라 해야지.’ 바로 한라산으로 갔다. 매표소에서 출발해 산을 오르는데 어째서인지 등산객이 하나도 없었다. 중간중간 담배를 피워가며 눈을 뭉쳐 갈증을 달랬다. 1,700미터쯤 올랐을 때 해가 졌다. 산중이라 금방 어두워지고 눈은 무릎 정도 푹푹 빠졌다. 굉장히 기뻤다. 이제 잠만 자면 죽는구나. 어스름 달빛에 주변을 보니 조릿대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이 보여 무조건 그 자리에 누웠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고 힘들게 산을 올랐더니 온몸이 녹작지근하니 스르르 잠이 들었다.
--- p.38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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