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사도적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온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결과로 누리는 은혜와 평강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기서 우리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 성부와 성자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은혜로 역사하신다. 먼저, 그분은 역사 속에서, 십자가에서 그것을 이루셨다. 그다음에 성경에서 자신의 택하신 사도들을 통해 그것을 알리셨다. 셋째로, 그분은 경험을 통해 오늘날 신자들에게 그것을 주신다.
--- 「1장 사도 바울의 권위와 복음」 중에서
우리는…교회 교사들의 인격이나 은사나 직무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대단한 위엄과 권위와 학식을 지녔을 수도 있다. 그들은 감독이나 대감독, 대학교수나 심지어 교황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사도들이 선포하고 신약에 기록된 복음 외의 복음을 가지고 온다면, 그들을 거부해야 한다.…앨런 콜(Alan Cole) 박사가 표현하듯, “메신저의 외적 인격이 그의 메시지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메시지의 본질이 메신저의 정당성을 인정해 준다.”
--- 「2장 거짓 교사들과 믿음 없는 갈라디아인들」 중에서
이제 믿음에 관해서는, 우리는 무적의 존재가 되어야 하며 할 수 있으면 철광석보다 더 단단해야 한다. 하지만 감동적인 사랑에 관해서는, 부드러워야 하며,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나 잎사귀보다 더 유연해야 하고, 모든 것에 굽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 「4장 단 하나의 복음」 중에서
일단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그분과 연합되면, 우리의 옛 삶은 끝난다. 우리가 다시 그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게다가 우리는 새로운 삶으로 부활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이 새로운 삶을 산다. 다른 의미에서 그 삶을 사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시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안에 사시면서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하늘나라에 대한 새로운 열망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가 다시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죄를 짓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우리 삶의 전체 방향은 바뀌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다르다. 우리 자신이 다르기 때문이다.
--- 「6장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 중에서
이것이 복음이다. 그것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일반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 선포다. 분사의 완료시제가 지닌 힘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이며, 그분의 십자가 못 박히심이 주는 유익은 영원토록 새롭고, 타당하며, 유효하다는 것이다. 죄인들은 그들의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때문에, 그들이 행했거나 행할 수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행하신 일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에 의해 의롭게 될 수 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주는 좋은 조언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는 것이다.
--- 「7장 갈라디아인들의 어리석음」 중에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붙잡는 것이다. 거기엔 아무 공로도 없다. 그것은 또 하나의 ‘행위’가 아니다. 믿음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대상인 그리스도 예수께 있다. 루터가 말하듯이, “믿음은 귀한 보석인 그리스도 예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붙잡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다. 믿음은 그분을 먹고 산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높이 들리셨다. 믿음은 거기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 「8장 믿음이냐 행위냐」 중에서
율법이 우리에게 상처 주고 괴롭혀야 비로소 우리는 복음이 우리의 상처를 싸맬 필요가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율법이 우리를 잡아서 가두어야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를 갈망할 것이다.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고 죽여야 비로소 우리는 칭의와 생명을 위해 그리스도를 부를 것이다. 율법이 우리를 스스로에 대해 절망하게 해야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다. 율법이 우리를 지옥에 이르기까지 낮춰야 비로소 우리는 복음이 우리를 하늘로 올려 줄 것을 의지할 것이다.
--- 「9장 아브라함, 모세, 그리스도」 중에서
회심의 기원은 초자연적이지만, 그 결과는 자연적이다.…그것은 나를 하나님께, 사람에게, 역사에 관련지어 준다. 그것은 내가 모든 인간의 질문 중 가장 기본적인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하나님의 모든 구속받은 백성들과 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나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제 몫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집으로 온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준다.
--- 「10장 율법 아래와 그리스도 안에」 중에서
우리가 한때 어떤 존재였으며 지금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하기만 한다면, 우리 안에는 우리의 모습대로 살고자 하는 욕구, 즉 그리스도로 인해 자유롭게 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에 걸맞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점차 커지게 될 것이다.
--- 「11장 한때는 종이었으나 이제는 아들」 중에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거부당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롬 8:17).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겪는 역설적 경험이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6:8-10에서 말하듯, 우리는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13장 이삭과 이스마엘」 중에서
그분은 우리의 어깨에서 멍에를 풀어내 우리가 자유롭게 되어 똑바로 설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렇다면 다시 율법 아래로 돌아가 그 잔인한 멍에에 복종하는 것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다는 말인가?…기독교는 속박이 아니라 자유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유 안에서 굳게 서야 한다.
--- 「14장 거짓 종교와 참종교」 중에서
처음에 우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라고 말한다. 그 자유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것,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의 양심의 가책을 깨끗하게 하는 것, 죄사함, 용납, 다가감, 아들 됨의 말할 수 없는 기쁨, 공로 없이 자비를 경험하는 것 등이다.
--- 「15장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본질」 중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나는 할 수 없다는 비극적 고백이 그리스도인의 내적 도덕적 갈등에 대한 최종 발언인가? 기독교가 제시하는 것이 계속된 패배의 경험뿐인가?” 실로 그렇지 않다. 각자에게 맡겨 두면 우리는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대신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한다”(16절).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할 것이다. 여전히 그런 욕구를 경험하지만, 그것에 탐닉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 「16장 육체와 성령」 중에서
그래서 복음의 진정한 특징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복음 전도자의 특징은 “예수의 흔적”이다. 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해당한다. 바울은 그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으며 그의 영혼에 예수의 은혜를 지녔다. 그리고 그는 수신자들도 같은 것을 지니기를 바란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그의 ‘형제’(이 서신서의 마지막 단어)이기 때문이다.
--- 「19장 기독교의 본질」 중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것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지시고 죽으신 그 죽음에서 모든 일을 하셨다. 우리가 유일하게 해야 할 역할은 예수님을 믿는 것, 그분의 죽음이 주는 유익을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하기 위해 무조건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기”(2:16) 때문이다. 믿음의 유일한 기능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의롭다 함과 양자 됨과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 「복습」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