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입할 때부터 익히 들었던 몰스킨의 히스토리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충분히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유명 작가와 화가들이 즐겨 썼다고 하니, 그들의 창의적인 DNA까지는 아니어도 같은 물건을 향유한다는 점에서 분명 동질감을 느끼고 싶을 테니까. 그러나 몰스킨의 위상이 높아지고 일반 문구 대열에 선 시점에 밝혀진 바로는, 몰스킨은 실제로 헤밍웨이나 고흐가 썼던 노트가 아니라 그들이 썼을 법한 노트의 정신을 잇는다는 묘한 뉘앙스로 포장된 제품이라는 것이다. 16년 전 회의나 미팅 중 꺼내는 내 몰스킨에 시선을 모으고 질문을 던지는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가격에 거품을 물었고, ‘무슨 그런 사치를…’ 이라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 「몰스킨을 쓴다는 것_ 몰스킨과 하드크래프트 케이스」 중에서
시즌마다 쏟아져 나오는 밀란의 신상 지우개 앞에서 하염없이 무너져 내린 나는 지금도 수집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밀란의 지우개 성능은 어떠냐고? 당연히 좋지!라고 단언하고 싶은데 잘 모르지. 누군가 스니커즈에 열광하며 신기 위함이 아니라 진열하기 위해 사듯, 나 역시 밀란 지우개는 지우기 위함이 아니라 모셔 놓고 눈으로 즐기기 위함이니까. 최소한 가장 저렴한 녀석으로 하나 써본 것이 전부이며, 일상에선 무난한 파버 카스텔 지우개를 주로 쓴다.
--- 「실수를 감싸 안아주는 친구_ 밀란 지우개」 중에서
오 마이 갓! 당황스러웠다. 거침없이 원샷 원킬로 선을 만들어내는데 대체로 값싼 펜촉에서 나타나는 거친 기운도 없었고, 잉크의 흐름도 균일했다. 손에 감기는 그립감과 플라스틱 재질도 거슬림이 없었다. 붓펜 또한 모 끝이 잘 빠져서 획 삐짐이 예쁘게 표현되고, 잉크 컬러도 눈으로 본 붓모의 색과 거의 일치하는 핫핑크였다. 두 펜 모두 필기하는 동안 분홍 펜대에 그려진 벚꽃에 마음이 다 살랑거렸다. 얘들아, 미안해. 아주 잠깐 2,000원이라는 선입견으로 판단하고 의심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경험해보지도 않고 비뚤어진 마음으로 감히 ‘가성비와 가심비 모두를 훌쩍 뛰어넘는’ 벚꽃 에디션 만년필과 붓펜 캘리그래피 세트를 판단하다니. 한낱 사물 앞에서 심오한 세상을 배웠으니, 남은 일은 이 두 펜이 벚꽃길만 걸을 수 있게 예쁜 글과 그림으로 보답하는 것뿐이다.
--- 「최고의 가성비, 설레는 가심비_ 다이소 벚꽃 에디션 필기구」 중에서
지금까지 이 모델이 사랑받는 이유는 웰메이드 디자인의 강점을 모두 지닌 이 극도의 미니멀리즘 스타일 때문이다. 딱히 첫눈에 반하지는 않지만 눈에 익으면 그것만 찾게 만드는 매력은 새롭게 옷을 갈아입는 마케팅으로 마니아들을 사로잡았다. 849 펜은 진즉부터 알렉산더 지라드와 폴 스미스 등과의 컬래버레이션으로 다양한 한정판을 만들었고, 여기에 리사이클링 캡슐 버전을 하나 더 추가했다. 이제부터 ‘글로만 언박싱’을 해보면, 네스프레소 캡슐 에디션 849는 박스부터 남다르다. ‘얘는 네스프레소 캡슐이었어’라는 문구로 자신의 출신 성분을 정확하게 밝히고 박스 가운데 부분이 캡슐 모양으로 뚫려 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해 캡슐을 하나 끼워보니 실제와 비슷한 사이즈다. 커피 강도 11의 다르칸 캡슐을 재활용한 이 펜은 다크블루 색상을 그대로 살렸고, 알루미늄을 재가공한 결과 무광에 펄 느낌이 나며 여느 849와의 촉감과는 또 사뭇 다르다.
--- 「지구야 널 한없이 사랑해_ 까렌다쉬 네스프레소 볼펜」 중에서
완성된 ‘페이퍼 패션’은 포장 디자인에 모든 아이덴티티를 담아 두툼한 하드커버 형태의 책을 만들고, 그 안을 병 모양으로 오려낸 후 향수병을 담았다. 누군가는 책 속을 파서 술 담긴 플라스크를 넣어두기도 하고 비상금을 쟁여두기도 하지만. 뿐만 아니라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세기의 문인이었던 귄터 글라스와 잡지 〈월페이퍼Wallpaper〉의 편집장이 가세해 서두에 짧은 에세이까지 실었다. 이쯤하면 단순히 책 향수를 만든 것이 아니라 시대에 길이 남을 북 퍼포먼스가 아닐까 싶다. 아, 그래서 책 향은 어떠냐고? 그래서 그걸 뿌려봤냐고? 여느 향수처럼 탑 노트와 미들 노트를 품진 않았지만, 베이스 노트만으로도 은은하면서 은근한 향이다. 독서를 할 때 집중하기 좋다고 알려지기도 했으니, 릴랙스를 위한 용도로도 적당할 듯하다. 똑똑해 보이고 싶거나 책 많이 읽는 티를 팍팍 내고 싶을 때, 페이퍼 패션으로 박학다식의 향기를 뿜뿜 해도 좋을 듯하고, 오래 묵은 책들을 꺼내 바람을 쏘여 줄 겸 바닥에 좍 펼쳐두고 공중에 분사해 책에게 책의 향을 선사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하지만 책은 읽어야 맛이라는 사실에 밑줄 좍!!
--- 「갓 인쇄된 책의 향기_ 슈타이들 북퍼퓸 페이퍼 패션」
제아무리 귀한 만년필이라도 길들임의 과정이 없다면 앞뒤 없이 날뛰는 야생마에 불과하다. 손의 온기를 받아들이고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각도를 군말 없이 따라주고, 이를 받아들이는 종이에게도 예를 갖추는 길들임을 온전히 익혀야만 진짜 제값을 하는 명품 만년필이 된다. 《어린왕자Le Petit Prince》에서 어린왕자는 사막여우에게 길들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묻었다. 사막여우는 ‘그건 관계를 맺는 것’이며 길들이면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고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가 된다고 했다. 그럼 어떻게 길들이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사막여우는 날마다 조금씩 가까이 앉으면 된다고 했다. 만년필도 손에 익을 때까지 매일매일 마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서로 길들이고 길들여질 때, 몽블랑도 비로소 펜 뚜껑이 열리기 한 시간 전부터 행복해할 것이다.
--- 「글 쓰는 모든 이들의 로망_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만년필」 중에서
연필의 부활 속에 일조했던 예술가들의 혼을 다음 세대에게 이어가는 모양새는, 블랙윙을 쓰는 나까지도 기분 좋게 만든다. 이 일환으로 선보인 것이 바로 리미티드 에디션인 ‘볼륨’이다. 볼륨 역시 문구계에 불고 있는 계절 신상 트렌드로, 분기별로 선보이는 블랙윙의 신상 연필 시리즈이다. 음악, 미술, 체육, 문학 등 예술 전반에 걸쳐 영향을 준 인물이나 사물, 장소를 골라 색다른 컬러 디자인과 함께 VOL. 뒤에 숫자로 명명한다. 아, 이 시리즈 덕에 통장이 텅장이 됐고 여전히 출시하는 신상 볼륨은 이를 악물게 한다. 지난 분기에 출시된 ‘VOL.155 바우하우스’는 전 세계 품절 사태에 이르렀다. 몇날 며칠을 국내외 온라인 문구 상점을 뒤지고 뒤져 운 좋게 득템하니, 내가 나를 칭찬했다. 진짜 이게 뭐라고!
--- 「치명적인 연필 한 자루의 매력_ 팔로미노 블랙윙 연필」 중에서
종이는 문구의 어머니다. 만약 종이가 없었다면, 수많은 필기구는 벽이나 땅바닥을 헤매다 멸종했을 것이다. 아무리 디지털로 초토화 되어가는 일상에서도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종이와 조우하며 산다. 서류를 만들고, 출력하고, 책을 읽고, 영수증을 받고, 휴지를 쓰고, 돈을 센다. 그래서 이다지도 존재감이 센 종이를 어머니로 모시는 의미에서, 난 종이 집착증을 갖고 사는 편이다. 노트를 고를 때도 까탈스럽게 종이 질을 따진다. 종이 질에 따라 흑연과 잉크, 물감 등을 받아들이는 마인드도 다르고 완성 후 품어주고 소화하는 능력 또한 판이하다. 이로 인해 여행 중 보이는 족족 노트를 사들여 해당 도시를 그 종이로 기억하는 습관도 갖게 되었고, 호텔 룸에 비치된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수거해 오는 병도 생겼다. 물론 요즘은 박정해진 호텔 인심으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긴 하지만.
---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기쁨_ 크레인앤코 노트와 카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