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는 저만치 날아간 사랑이의 숟가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듯했다. 목에 박혀 있던 어떤 말이 열을 내는 건지도 몰랐다. 머릿속에도 이상한 생각이 피어났다. 얘들은 언제부터 빵을 싸오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졌을까?
---「1권, 수저」중에서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영지는 그저 떨어진 과도를 주운 것뿐인데, 잠깐 공황장애가 와서 숨을 쉬기 힘들었던 것뿐인데 경찰에게 쫓기고 있었다. 영지는 두려워졌다. 다시 숨을 쉬기 힘들어져 마스크를 벗어 한 손에 든 채 조금씩 뒷걸음을 쳤다.
---「1권, 코로나 블루」중에서
그런데 참 희한하지. 사람은 쉽게 물건을 잊는데 말이야, 물건은 사람을 쉽게 못 잊어. 그것들은 자신에게 닿았던 인간의 목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지. 아마 자네가 쓰는 물건들도 자네와 말투가 꼭 닮아 있을 거야.
---「1권, 사물과 사람들」중에서
행복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빈도의 문제라는 말은 수진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었다. 빈도가 잦아지면 크기도 커지는 건데 누굴 위로하려고 그런 말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결국 행복의 빈도가 잦고 크기도 커지는 게 최고로 행복한 것인데 말장난으로 위로하려 드는 사기꾼들이 싫었다.
---「1권, 공생」중에서
“힘들다고 버리는 게 사랑이면 난 평생 사랑 안 할 거야.”
---「1권, 모로 누우면」중에서
든든하라고 소를 꼭꼭 눌러담은 만두가 먹을 때마다 얹혔다니,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꼭꼭 다진 사랑만 배워서 성기게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데. 경주마 같은 우주에게는 눌러담은 사랑이 버거웠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1권, 만두 대첩」중에서
그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거다. 그러기 위해선. 엄마를 죽여야 한다.
---「1권, 미안해」중에서
“어때요, 정말 재미있죠?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을 겁니다. 김신혁이는 나한테 착한 모습만 꾸며 보인 아이였더라고. 왜 어린애라도 못돼 처먹은 애들이 있잖아요? 학교 선생들이 늘 하는 소리, 싹수가 노란 애들은 일찌감치 잘라버려야 한다잖아요. 김신혁이도 그런 누런 싹이었어.”
---「1권, 스트라디바리우스의 행방불명」중에서
순간 내 머릿속에 위험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유혹이었다. 나의 호기심을 한 번에 채워줄 수 있는, 그러나 너에게 떳떳할 수 없는 유혹.
---「2권, 진실퀴즈」중에서
“물건이라는 거, 눈에 안 보이면 결국에는 사라져버리잖아. 서랍 속에 넣어놨다고 생각한 물건이 찾아보니 어디론가 없어진 것처럼 말이야.“
---「2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중에서
봄바람. 설렘과 불길함이 동시에 가득한 단어가 여기 있다. 봄과 바람이라니.
---「2권, 연애시대」중에서
K는 씻지도 못한 채 그대로 쓰러져 잠에 빠져들면서 생각했다. 오늘은 정말 운 나쁜 하루구나…… 마지막까지 아주 그레이트하다.
---「2권, 운수 좋은 날」중에서
저 바닷물 좀 봐. 지구가 반듯하니까 물이 옆으로 흘러내리지 않는 거란다. 나지막이 읊조리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따스한 기운이 가슴속에 퍼져 나가곤 했다. 곧 사라져버릴 그 순간에 잠시만 더 머물고 싶었다. 햇볕에 말린 솜이불에 몸을 파묻듯. 아주 잠깐이라도.
---「2권, 플랫 어스」중에서
다만, 이제 우리는 어느덧 피해갈 수 없는 인생의 기로에 놓여있었다. 더 이상 인생의 안전지대에 마냥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2권, 은밀한 계절」중에서
다시 책장 앞에 선 은영의 뒷모습은 어쩐지 네모난 책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2권, 은영」중에서
꿈을 꿨다. 햇볕이 강렬하고 바람이 뜨거워 사막인 것을 알았다. 운동화 끝에 까슬한 모래가 닿았다. 끝없이 이어진 길 위에 혼자 서 있었다. 그대로 멈춰 있을 수는 없어서 무작정 걸었다.
---「2권, 우리는 겨울을 건너고 있다」중에서
허한 마음은 갈 곳을 잃고 헤맨다. 나는 행복을 꿈꾸면 안 되는 거였나. 그리 대단한 걸 바라고 살지도 않았는데 그 조그만 행복을 빼앗긴 기분이 들어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쉬운 것들이 나에게는 왜 이리도 어려운 것인지.
---「2권, 너의 부재」중에서
극도로 날카로운 칼에 베이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베인 곳은 베이기 전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잠시 후 상처를 중심으로 피가 배어나와 주위로 퍼지고, 마지막에 통증이 찾아온다. 상처가 깊을수록 피가 퍼지는 곳은 넓어지고, 통증이 찾아오는 시간도 길어진다. 마음도 똑같다.
---「2권, 구름 속의 범고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