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분쟁을 법정으로 가져가는 게 당연한 사회가 되면,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고소당할 것을 각오하고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 미국인들은 법조(法曹)가 아닌 일반 사람들도 일상적으로 “We will sue you(고소할 거야).”라고 말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수(sue)족’이라는 말이 붙은 적도 있었다. 그만큼 소송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린 사회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어느 날 느닷없이 법정에 출두하여 자신에 관해 시시콜콜 폭로당하는 걸 늘 각오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당신은 그런 생활을 감내할 수 있겠는가?
--- 「제1장 사회가 무너지는 것은 법률 탓?」 중에서
간혹 스포츠 선수나 유명인이 (도박으로) 적발되고는 하는데, 같은 일을 하고도 적발?체포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오는 것은 왜인가? 형사소송법에는 “범인의 성격, 연령 및 처지, 범죄의 경중 및 정상, 또 범죄 후의 정황에 따라 소추를 할 필요가 없을 때는 공소를 제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조문이 있다. 때문에 돈내기 마작을 한 사람 모두가 수사되고 체포되는 것은 아니며 경찰이나 검찰의 재량에 의한다. ……즉, 법률이 체포될지 아닐지도 운 나름이라고 정하고 있는 것이다.
--- 「제2장 클론인간의 제작은 NG(No Good)인가?」 중에서
여러분은 어떨 때 자기도 모르게 “부정이다!” 또는 “허용할 수 없다.”는 말이 튀어나오는지 상기해보기 바란다. 타인의 물건은 뭐든 빌리는 주제에 자신의 물건은 어느 것 하나 빌려주지 않는 자, 자신의 지위와 입장을 이용해 제 자식을 뒷구멍으로 대학에 입학시키는 문부과학성의 관료, 모두가 (내고 싶지 않은데) 납세하고 있는(하게끔 되어 있는) 가운데 몰래 탈세하는 자, 지위를 이용해 부하에게 성적 관계를 강요하거나 당치 않은 일을 시키는 자…… 등등.
아무래도 ‘정의’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려면 그런 일상적인 ‘부정’에 대한 분노의 감각에서부터 접근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부정’을 뒤집으면 ‘올바름’이, 그리고 단순한 독선과는 다른 ‘정의’의 의미가 보일 것이다.
--- 「제3장 고소득은 재능과 노력 덕분?」 중에서
어떤 사회에나 반드시 빈부의 격차가 있다. 이를 “재능이 있고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부자가 되고, 재능이 없고 분발하지 않은 사람이 결국 가난해진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마침표를 찍어도 좋을까? 물론 세상에는 잠을 아껴가며 일하는 사람과 게으름뱅이가 존재한다. 본인 탓이라는 요소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현대의 빈부격차는 그러한 인간의 성격이나 의사에서만 유래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출발점부터 불공평한 것이다. 태어난 집안이 대부호이고 더욱이 그 나라의 다수자인 까닭에 차별을 받지 않고 유아기부터 풍부한 자금으로 고도의 교육을 받고 커서는 셀럽(celebrity: 유명인사) 그룹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능력이 있어도 학교를 마음대로 다닐 수 없는 까닭에 스킬을 습득하지 못하여 빈곤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는가는 본인의 탓이 아니므로, 하다못해 그 스타트라인의 부당한 격차를 가능한 한 줄이려는 정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 「제3장 고소득은 재능과 노력 덕분?」 중에서
이 건에 대해 한나 아렌트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썼다. 아이히만의 “완전한 무사상성, 그것이 그가 저 시대의 최대 범죄자 중 하나가 되는 요인이었다.” 전문적 지식과 능력이라는 점에서는 유능할지라도 인간으로서 사고하기를 포기하고 오로지 명령에 따르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상사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한 관료의 범용(凡庸)이라는 이름의 죄가 얼마나 깊은지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그가 무엇이 나쁜 일인지 몰랐던 것(처럼 보이는 것)이 더더욱 무섭다. 사고 없는 준법이야말로 가장 질 나쁜 것이다.
--- 「제4장 악법에 거역하는 악동이 되어라!」 중에서
요즘의 대학생은 성실하다. 가엾을 만큼 성실하다. 예컨대 새벽부터 방재 속보 알람이 연달아 울리고 기상 정보는 호우 정보를 발하며 이른 아침부터 JR의 일부 구간이 운전 중지되고 또 그런 구간이 확대되어가는 분위기인데도 “대학에서 휴강 연락이 없었다.”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1교시 강의 출석을 위해 등교한다.
“이렇게 큰비가 오는데 외출하는 건 위험해. 못 돌아올 수도 있어. 안전을 위해 쉬자.”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오로지 ‘대학으로부터 지시’의 유무에 따라 행동한다. 이유는 “혹시라도 강의가 진행되어 출석을 체크할지도 모르니까.”라는 것이다. 출석과 몸의 안전 중에 뭐가 중한가?
그러나 요즘의 대학생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 지시 대기자”라고 비판하는 것은 그들·그녀들에게 가혹하다. 요즘의 대학생들이 이렇게 가엾을 정도로 성실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학이 출결을 체크하게 된 것(초등학생도 아닌데), 그리고 (옛날에는 없었던) 학기 15회 강의라는 룰 때문에 대학이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휴강을 하지 않게 된 것 등, 문무과학성에 의한 대학의 속박이 강화된 것에 기인한다.
--- 「제4장 악법에 거역하는 악동이 되어라!」 중에서
대체로, 선악을 정해놓고 사람들에게 권력으로써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강제하는 규정이나 규칙 중에는 제대로 된 게 없다. 교칙이 그중에서도 제일이다. 어떤 고등학교에서는 “머리는 검어야 한다.”며 태어날 때부터 갈색 머리를 가진 소녀에게 염색을 강요했다. 무리하게 계속 머리를 염색했던 소녀는 두피에 손상이 와 고통을 호소했다. 그 교사는 이에 대해 사과는커녕 아무리 “금발의 외국인 학생이 유학 왔다 해도 검게 염색시킨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사고정지다. 대체 머리색이 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인가? 머리가 검지 않으면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교사들도 제대로 교육을 하기 위해 머리를 염색해야 할 것이다. 백발의 선생도 까맣게 염색해야 하고,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한 선생도 두피에 유성펜으로 검게 칠해야 한다.
--- 「제5장 적령기의 아이에게 피임의 자유를 허하라」 중에서
부모에게 피임의 방법을 물어봐야 통상은 가르쳐주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너, 이상한 짓 하는 거 아니니?” 하며 외출 금지나 감시가 한층 심해질 게 뻔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이들은 피임 지식 없이 성교를 했다가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게 되는 나쁜 결과가 허다하게 있어왔다. 그런 이유로 영국 정부는 피임 조치 없이 성교하는 아이가 부모의 허가가 없어도 필 등 피임 수단을 얻을 수 있게 한 것이다.
--- 「제5장 적령기의 아이에게 피임의 자유를 허하라」 중에서
좌석 수가 그리 많지 않은 카페에서 단 한 잔의 커피를 시켜놓고 장시간 죽치고 앉아 노트북 좌판을 두드리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람이 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거지반 한 세기가 지났는지 컵 안은 물기 한 점 없다. 혹은 떼로 몰려와 딱 한 잔의 음료만 주문하고는 재잘재잘 떠들면서 한없이 자리를 독점하고 있는 무리가 있기도 한다.
솔직히 그런 손님은 가게의 입장에선 성가실 것이다.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겠지만, 다른 손님도 받고 싶으니 빨랑 돌아가든지, 오래 앉아 있을 양이면 주문하든지, 그렇게 생각할 게 틀림없다. 당연히 새로 가게에 들어오고 싶은 손님에게도 그런 앞 손님은 방해꾼이다. 그러나 가게 주인도 다른 손님도 당사자 또는 당사자들에게 직접 주의를 주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커피 한 잔밖에 안 시켰지만 나는 버젓한 손님이다. 나에게는 한 잔의 커피로 이 가게에서 오랜 시간 즐길 권리가 있다.”는 식으로 되받아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만 물을 따라주어 귀찮게 하거나 음악 볼륨을 서서히 높여 앉아 있기 어렵게 하는 등 간접적으로 눈치를 줄 수밖에 없다.……
그 감정을 이치에 닿는 말로 표현하면 이렇다. “손님은 당신만 있는 게 아니다. 가게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즐기고 싶어 한다. 그러니 당신의 ‘느긋하게 즐길 권리’ 행사를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도 느긋이 즐기게끔 자제해주기 바란다.” 이것이 바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알려진 공리주의의 출발점이다.
--- 「제6장 다수의 행복을 위해 당신이 희생되어주세요」 중에서
애초에 사람들을 평등하게 보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생각에서 나온 공리주의가 “사회 전체의 불이익을 최소한으로 하자.”는 발상으로 전환되는 순간, 불이익을 당해야 할 사람들을 찾아내는 선별 사상으로 바뀌고 만다. 그리고 그러한 선별을 할 때 방금 살펴본 실례처럼 편견과 멸시가 작동하거나, 최종적으로는 불리해지는 사람 수 크기로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선별은, 물론 선별의 책임을 지는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 「제6장 다수의 행복을 위해 당신이 희생되어주세요」 중에서
사람을 행복을 느끼는 ‘주체’가 아니라 행복 최대화를 위한 ‘수단’으로 파악하기 시작했을 때, 공리주의는 냉혹한 선별 사상으로 일전한다. 본래 사람에 따라 가치관이 다른데 만인에게 공통하는 행복의 내용을 결정할 수 없고, 그것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도 없다. 이를 모르는 인간이 정치가가 되어 짝퉁 공리주의를 휘두르며 “LGBT는 생산성이 낮다.”든가 “LGBT가 늘어나면 나라가 망한다.”며 어리석은 발언을 의기양양한 얼굴로 하기 때문에 곤란한 것이다.
--- 「제6장 다수의 행복을 위해 당신이 희생되어주세요」 중에서
어떤 속성에 근거한 평등일지라도 다른 속성에서 보면 불평등할 수밖에 없고, 복수의 속성을 고려했다 해도 그 우선순위와 비중의 배치에 따라 가일층의 불평등이 생긴다. 그런 이유에서, 평등이라는 가치의 추구를 그만두는 게 좋지 않겠는가, 말하는 사람이 나와도 뜬금없지 않다. 또, 확실히 그런 주장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이유 없이 타인보다 불리한 취급을 받으면 “불평등하다!”며 분노하기 때문이다. 이 분노의 감정은 무시할 수 없다. 완벽한 평등의 실현이 불가능할지라도,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점에서 ‘불평등’을 인지하고 그것의 시정을 요구한다. 그런 감정이 있는 한, 평등이라는 가치의 추구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 「제10장 불평등의 근절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중에서
“그런 환경관리 따위의 술책을 쓰다니!”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많으실 것이다. 그러나 환경관리는 현재 더 알아챌 수 없는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기력이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 스마트폰이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한 당신, 그렇다, 바로 당신이다! 스마트폰이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은 스마트폰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에 의지하고 있는 당신, 친족 친구의 연락처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모르는 것이 있으면 웹 검색만 하면 된다며 책도 신문도 안 보고 있지 않습니까? 키를 눌러 메시지를 보내는 데 익숙해져 간단한 한자도 쓰지 못하게 된 건 아닙니까? 길을 걷다 보면 줄곧 스마트폰만 쳐다보며 걷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스마트폰을 안 보면 곧 죽어버릴 병에라도 걸린 겁니까!
스마트폰은 확실히 편리하다. 너무나 편리해서 인간의 능력을 싹 빼앗아가버린다. 우리는 스마트폰에 길들여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일단 블랙아웃되면 스마트폰은 장방형의 판때기로 전락하고 현대인은 크로마뇽인보다 무력해질 것이다.
--- 「제11장 나에겐 ‘누군가에게 먹힐 자유’가 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