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화할 은, 눈 설. 우리 공주의 이름이오.”
은설이 태어나기 얼마 전, ‘은설’이란 이름은 스러져가는 왕의 입에서 힘겹게 터져 나왔다. 더는 온기를 찾을 수 없는 대전에서 시체처럼 용상을 지키고 앉은 왕, 유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곁에 고개를 조아리고 앉은 중전, 홍 씨는 부른 배를 움켜쥐며 입술을 악물었다.
“아주 예쁜 이름이옵니다, 전하.”
p.13
조선을 쥐고 흔들겠단 그의 야망이 폭주하는 순간이었다.
이학수의 비열한 미소에 중전은 더욱더 배를 감싸 쥐었다. 이학수의 조소 뒤에 감춰진 숨은 뜻을 알기에 중전은 더욱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중전은 독을 품은 꽃처럼 속내를 숨긴 채 미소를 지었다.
“예. 좌상의 바람대로…… 내 반드시 순산해, 조선의 혈통을 이어나갈 것입니다.”
--- p.23
“주 상궁.”
“예, 마마.”
“이제부터 이 아이는…… 세상에 없는 아이인 것이다.”
중전의 말에 주 상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말을 내뱉는 중전 역시 가슴이 찢어지는 듯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반 시진 전보다 더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산사엔에는 들짐승의 구슬픈 울음만이 가득했다.
“살리기 위해 죽일 것이다.”
p.30~31
유희는 그대로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말았다. 공주를, 이 귀한 공주를 대신 키워달라니,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납작 엎드린 유희의 두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중전의 말에 유희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 이 아이를 출산한 것이 아니네.”
“마마.”
“나는 다시 부른 배로 궐로 돌아가, 예정된 산달에 다시금 아이를 출산할 것이네. 물론 죽은 아이를.”
p.35
“이 조선의 임금이란 놈은! 허구한 날 계집질에, 툭하면 사람을 죽이고, 패고, 두드려 부수고 말이여! 안 되겠어, 내 이놈의 폭군을! 혼구녕을 내주어야지!”
“하하하, 하하하하!”
놀이패들의 거친 입담에 백성들은 모두 하하, 호호 재미있다는 듯 손뼉을 치며 배를 잡고 웃었다.
p.52
그날의 진실은 오로지 그들만 알고 있을 것이니.
“차라리, 나의 아버지를 옥좌에 앉히겠다!”
“참으로 아둔한 왕이로다, 허허허!”
한데 그런 이학수의 아들인 금상에겐 치명적인 추문이 뒤따르고 있었다. 계집질을 일삼고 술만 마시며 툭하면 나인들을 때리고 궐의 모든 물건을 때려 부수는 흉악한 폭군이라는.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칼도 제멋대로 휘둘러 궐에서 죽어 나간 궁인들도 꽤 된다는.
p.53
“미친놈들…… 저것들을 모두 의금부로 처넣어 육시를 내어야 할 것이다.”
어디선가 깊은 분노가 서린 낮은 음성이 흘러왔다.
은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키가 훤칠한 사내 하나가 삿갓을 깊숙이 눌러쓴 채 입술을 세차게 악물고 있었다.
화를 삼키는 사내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금방이라도 손에 쥔 검으로 놀이패를 베어낼 것 같은 살기마저 느껴졌다.
p.54
서늘한 눈매가 아름다운 사내였다. 다른 이의 시선을 앗아갈 만큼 처연하고 냉랭한 눈빛. 그리고 그 끝에 서린 야릇한 기운은 보는 이의 가슴을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계집도 아닌데, 어찌 저리 피부가 하얗고 고울 수가 있을까?
은설은 침을 꼴깍 삼키며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깊고 아름다운 눈, 그 아래 잘 자리 잡은 굳게 다문 입술 역시 붉고 영롱했다.
“곱다…….”
p.54
저와 사내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맞닿은 시선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시렸다. 은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온몸에 열이 화르륵 오르는 것만 같았다. 괜스레 찔려, 놀라버린 은설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때, 놀이패를 구경하던 무리가 왁자지껄 떠들며 그녀의 앞을 스치고 지났다. 다급하게 돌아서던 은설은 그만, 우르르 물러나는 그들과 부딪혀 휘청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다 굳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사내의 발을 질끈 밟으며 사내 위로 넘어졌다.
p.55
“누가 보낸 것이냐. 감히 네까짓 게 누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야. 누구의 사주를 받고 나를 죽이러 온 것이냐, 물었다.”
잔뜩 가라앉은 진중한 음성에 은설은 혹여 자신이 실수라도 한 것일까,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죽이긴 뭘 죽인다 그러시오?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것뿐인데…… 그것으로 사람이 어찌 죽는다고. 그리고 여기 저자에 쳐다보면 아니 될 사람이 있답니까?”
“뭐라.”
“그리고 왜 초면에 반말이오? 댁, 나를 아시오?”
“하, 건방지구나.”
p.57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가만두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래서 날 가만두지 않을 것이냐.”
그때였다. 은설의 귓전에 익숙한 음성이 바람처럼 불어왔다.
p.79
“이학수 대감을…… 아니, 몸을 숨길 곳을!”
아무래도 숨을 곳을 급히 찾는 모양이었다. 도윤은 자신의 뒤를 한 번, 여전히 정신없이 뱅뱅 도는 은설을 한 번 바라보더니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예?”
“따라오라.”
p.84~85
“너는 매번 그렇게 나와 다른 길을 가려 하는구나. 정녕 네가 나의 뜻을 거스르고도 강한 군주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느냐.”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어차피 곤룡포를 입은 것은 소자이지만, 옥새를 쥐고 있는 것은 아버지이시니…… 이 피비린내 나는 삶의 시작을 아버지 멋대로 시작하게 하였으니……. 예, 좋습니다. 그 처음도, 또한 소자의 삶도 아버지가 모두 쥐고 흔드십시오.”
위태로이 서 있는 도윤의 등 위로 외로움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하나, 이 삶을 끝내는 마지막만큼은 소자의 것입니다.”
p.106
“반드시 사랑에 빠진다.”
느리게 그 말을 내뱉던 도윤이 피식, 보드라운 미소를 입매에 그렸다. 그러곤 딱딱하게 굳은 은설의 어깨에 커다란 제 손을 살며시 얹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나와 그리되어도 괜찮겠느냐. 사랑에 빠져버려도.”
일순. 은설의 말랑말랑해진 심장이 발아래로 쿵 떨어지고 말았다.
p.123
마음의 소리가 제멋대로 튀어나오자 도윤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첫눈에 반했다는 표현이 옳을까 싶을 정도로 한눈에 들어선 저 여인이었건만.
저 여인의 몸짓 하나, 표정 하나, 웃음 하나 모두가 의미가 되어 제 가슴에 박히고 있건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흔들리고 마음이 잠식되어가 혼란스럽고 당황스럽건만.
왜, 어찌, 가문까지 이리 엮여 거부할 수 없이 제 속을 쥐고 흔들고 있단 말인가.
p.132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매우 급한 순간에도 끝까지 도윤을 보호하는 은설이었다. 그것을 모조리 바라보고 있던 도윤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를 믿어도 될까, 은애하는 마음을 키워도 될까, 그녀에게로 기울었던 그 마음을 의심했던 자신이 한심해지는 순간이었다.
“너를 은애하지 않을 수 없구나.”
p.177
“소녀 역시 나리를 뵈어야겠습니다. 해서 이 마음이 단순한 인정(人情)인지, 그 사이로 피어난 연정(戀情)인지, 알아야겠습니다.”
은설의 가슴이 오래도록 떨렸다.
은근한 설렘 역시 오래도록 가실 줄을 몰랐다.
p.185
“아무래도 내가 널 연모, 그 비슷한 것을 하는 모양이다.”
그의 동공이 떨렸다. 확신에 찬 눈으로 말한 그의 고백은 그녀의 가슴을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두근두근, 가쁘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은 곧 그녀의 숨결을 옅게 흔들었다.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아차리자, 그가 그녀에게 한걸음 더 다가갔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떨림이고, 처음 느껴보는 설렘이다. 그리고 그 떨림과 설렘이…….”
“나리.”
“오롯이 널 향해 있다.”
p.215~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