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 베르나르와의 운명적인 만남 이후, 아르 누보의 기수로서 그의 천재성은 여러 분야에서 표출된다. 1898년, 뮈샤는 그리스 비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연극, [메데Medee]의 포스터를 맡는다. […] 이때 칼을 잡지 않은 메데이아의 왼쪽 팔에는 의미심장한 팔찌가 채워져 있는데, 이 디자인을 눈여겨본 사람이 사라 베르나르 외에도 또 한 사람 있었다. 당시 파리 최고의 보석상이며 하이주얼리 디자이너였던 조르주 푸케(Georges Fouquet, 1862~1957)였다. 그래서 사라 베르나르가 주문을 하면, 그녀의 영감을 취합한 뮈샤가 디자인을 하고 푸케가 제작하는, 불세출의 작업 방식이 탄생했다.
--- 「1부, 뮤즈와 예술가들 중 "신세계로부터"」 중에서
영국의 수정궁이 거둔 영광을 어떻게든 누르고 싶었던 프랑스의 자존심을 건 경쟁심은, 과거의 실패로 절치부심하던 에펠을 다시 한 번 이 위대한 프로젝트에 끌어들였다. 그리고 310미터의 에펠 탑이 완성됐을 때, 드디어 프랑스는 세계 최고最高의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영광을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되는 1930년까지는) 지킬 수 있었다.
[…] 초기의 만국박람회가 영국과 프랑스를 주축으로 한 유럽 열강들의 경쟁적 국력 과시였다면 참가국들이 늘어나고 국제적인 행사가 된 이 시기에는 신생 국가나 독립을 희구하는 약소국들이 자신의 생존을 알리는 장으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 수립 후 첫 박람회인 1900년 만국박람회 참가에 특별히 힘을 기울였던 이유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만국박람회에서의 이러한 세계 문화와 물산의 전시가 서구인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냉정한 현실이다. […] (이러한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국제식민지박람회에 등장한 ‘인간동물원’이다. 1931년 파리 식민지박람회 때에도 식민지 주민들이 다른 동물들과 함께 우리에 전시되었고, 1958년 브뤼셀의 만국박람회에서는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콩고에서 데려온 원주민들이 [콩고 마을]이라는 사파리 스타일의 전시관에 전시되었다. 구미의 근대화와 제국주의를 철저히 학습했던 일제 역시 1907년 3월 오사카와 도쿄에서 열린 권업박람회에 조선인 남녀 두 명을 전시했다.)
--- 「2부, 전환의 시대 중 "만국박람회라는 쇼윈도"」 중에서
‘대서양 횡단 유람선에서 어떤 샴페인을 마셔봤다’는 경험은 곧 판매에 직결되었기 때문에 이 엄청난 이권을 두고 각 샴페인 회사들의 치열한 경쟁이 일어났다. 다른 브랜드와 차별화를 꾀하기 위해, 신대륙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프랑스의 귀족들, 왕가, 황제, 수도사, 미망인들이 소환되었다. 아르 누보의 등장과 인쇄술의 놀라운 발전은 석판화 포스터를 유행시켰고, 알퐁스 뮈샤나 툴루즈 로트레크, 외젠 그라세 같은 거장들이 등장했다. 당연히 이들 그림은 광고가 되어 온 파리 거리를 수놓았다.
--- 「2부, 전환의 시대 중 "벨 에포크의 성수, 샴페인"」 중에서
『사포적 목가』의 충격은 강력한 것이었다. 기독교적 가치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고, 비교적 남의 사생활에 관대했던 벨 에포크의 사람들도 이 소설만큼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파리의 제일 유명한 쿠르티잔에서 베스트셀러의 작가라는 날개까지 달게 된 리안 드 푸지는 더욱 화려한 삶을 산다.
[질 블라스Gil Blas]라는 일간지에 자신의 쿠르티잔의 경험을 토대로, 이 시대의 남자들의 세상의 도덕과 위선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비판하는 소설을 개제, 또 한 번 신드롬을 일으킨 뒤에, 1904년, 『아름답게 사는 법L’art d’etre jolie』이라는 주간지를 발행한다. 당연히 창간호의 표지 모델은 그녀 자신이었다. 이 잡지는 그녀가 살아오면서 터득한 모든 아름다움에 대한 노하우를 독자에게 전수하는 주간지였다. 단지 아름다워지는 방법뿐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아름답게 느끼는 법,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방법을 전하는 잡지였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을 얽매던 관습과 남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위선의 베일을 벗어던진 리안 드 푸지의 행보를 그저 충격과 환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잡지는 열렬한 애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무려 25호나 발행되었다. 요즘의 패리스 힐튼이나 마돈나에 버금가는 행보였다.
[…] 한편, 마르그리트 뒤랑은 당시, 모든 스텝과 기자가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라 프롱드(La Fronde, 반항)』라는 잡지를 창간, 무려 5년 동안 발간했다. 그녀는 이 잡지를 통해 여성의 권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여권 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당연히 여성의 권리,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 다루어졌고, 여권에 있어서의 나폴레옹 법전의 위선에 대한 폭로, 여성 차별 방지법 상정을 위해 투쟁했다. 그녀가 특히 주력했던 것은 여성의 참정권이다. 그녀는 올랭프 드 구즈가 단두대에서 한 마지막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성이 사형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당연히 의정 연설 연단에 오를 권리도 있다.”
--- 「2부, 전환의 시대 중 "두 여자의 다른 삶, 같은 꿈…"」 중에서
그 당시 파리는 수차에 걸친 만국박람회 덕분에 유럽 그 어느 곳보다 이국적인 문화에 열린 마음을 가졌던 코스모폴리탄의 도시였다. 주도면밀한 디아길레프가 파리를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더욱이 파리라면 그가 예술 잡지 일을 할 때부터 친분을 쌓아온, 수많은 화가와 작가, 작곡가, 상류사회의 오피니언리더들이 있었다. 실지로 발레 뤼스의 샤틀레 극장 첫 공연은 프루스트의 뮤즈이자 파리 최고의 살롱을 경영하던 그레퓔 백작부인이 후원하고 있었다. 그녀를 추종하던 살롱 멤버인, 온 파리의 상류층 인사들과 예술가들이 총출동한 것은 물론이다. 디아길레프는 프랑스 사람들이 러시아인들에게, 또 러시아 발레에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디아길레프의 기대처럼, 아니 기대 이상으로, 포킨의 안무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 「3부, 그레퓔 백작부인의 살롱 중 "발레 뤼스의 충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