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기억은 오로지 ‘위험으로부터 살아남으라’고 하는 긴박한 신호를 끊임없이 내보내는, 변치 않는 단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다. 생존을 위해서는 정말 최선을 다해야 하니, 트라우마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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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만 해도 트라우마 치료를 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트라우마 기억을 떠올리고 버티면서 그 기억과 함께하는 것stay with it이 중요하다는 믿음이 컸었다. 그러나 최근 많은 트라우마 전문가들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 기억을 떠올릴 때 곁에서 누군가가(사랑하는 사람, 가족 혹은 신뢰할 수 있는 치료자) ‘내가 지금 함께 있어요stay with me’라고 말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요한 사람과의 연결감을 통해서만이 트라우마 기억의 압도적인 에너지로 마비되었던 우리 뇌의 적응적 정보처리 시스템이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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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어. 하지만 어떤 일이 있었든, 그것은 과거의 일이고 이제 너는 거기에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영화 속에서 마담 프루스트가 폴에게 들려준 이 말을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이 가슴속에 간직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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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날 물어뜯었던 사나운 개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그 개를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한다면, 개의 날카로운 이빨에도 찢겨져 나가지 않는 튼튼한 갑옷을 온몸에 두르거나 커다란 몽둥 이를 들고 있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트라우마 기억을 다시 떠올리려면 먼저 튼튼한 갑옷과 커다란 몽둥이같이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자원을 충분히 갖고 있어야 한다. 또한 늘 옆에서 힘이 되어주고 위안을 줄 수 있는 든든한 내 편, 가족이나 친구, 혹은 치료자의 존재도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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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안정애착을 어린 시절 경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성인이 되고 나서라도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얼마든지 안정애착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관계를 통한 회복이 일어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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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의 원인이 무엇이든, 거식증 환자가 음식을 먹을 용기, 체중 증가를 받아들일 용기, 즉 거식이라는 방어벽을 내려놓고 내면의 두려움과 공포에 직면하는 용기는 누군가의 절대적인 이해와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안정적인 돌봄과 연결감을 제대로 경험해야 비로소 우리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투쟁적인 생존 모드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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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에서 소리가 들리는 증상internal voice에 대한 최근의 연구 결과들은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 신체적 학대, 언어적 학대, 지속적인 방임, 폭력 등과 연관이 많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런 경우 단지 내면의 소리를 없애기 위한 약물치료만을 할 경우, 트라우마와 연관된 내면의 소리는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두렵고 혼란스럽지만 그 내면의 소리가 어떤 문제를 알려주고 있고,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를 탐색해가는 정신치료적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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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명백하게 보이는 학대보다 은근하게 일어나는 무관심이 독성이 강한 수치심을 더 자주 일으킨다. 안타깝게도 트라우마가 수치심을 강화하고, 강화된 수치심은 또 다른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악순환의 고리가 끝없이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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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인 요인이 아니더라도 내적인 컨디션도 촉발요인이 될 수 있다. 혼자 방에 있을 때 느끼는 외로움, 누군가에게 무시당할 때의 속상함, 꼼짝 못 할 것같이 답답하고 갇힌 느낌, 다른 사람들은 다 행복해하는데 나만 왠지 소외된 것 같은 감정 등도 모두 트라우마 기억을 자극하는 촉발요인이 될 수 있다. 낮에 바쁘게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할 때는 그런대로 현실에 집중할 수 있는데, 밤이 되어 혼자 방에 있다 보면, 어린 시절 겪었던 외로움과 두려움의 기억이 떠올라 괴로워하다가 술을 마시거나 자해를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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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자의 비난이 내재화되면 폭력적인 실제 양육자에게 야단맞기 전에 먼저 아이의 내면에서 비난하는 소리가 자신을 선제공격한다. 그러면 아이는 양육자에게 실제로 야단맞기 전에 미리 정신을 차리고 양육자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 이러한 가해자의 내재화는 생존하기 위한 본능적인 방어기전으로 어린아이가 학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최선의 선택이다. 문제는 어릴 때 내재화된 가해자의 소리가 한참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되어서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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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외상 후 성장은 그리 특별하거나 거창한 개념이 아니다. 맹목적으로 성취와 성공을 추구하는 생활 태도를 내려놓고, 그 대신 감사한 마음을 자주 갖고, 작은 가능성에 즐거워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친근한 정을 나눌 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외상 후 성장이다.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변화이기도 하다. 개인에 따라 외상 후 성장이 일어나는 기간이 수개월이 되기도 하고 수년이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트라우마를 통해 오히려 이전보다 심리적으로 더 긍정적이고 성숙해지는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외상 후 성장에 다다르게 된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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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과 멸시는 말할 것도 없고, 방관과 무관심조차도, 심지어는 평상시의 규칙만을 염불하듯 외우는 완고함조차도 트라우마를 겪은 아이에게는 2차, 3차의 트라우마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마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까? 우리는 상처받은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떻게 공감해야 하는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하다못해 어떻게 하면 절대로 안 되는지, 어디에서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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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제 세상의 인식이 그리고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범죄 피해자 상담센터, 성폭력 상담센터, 학교폭력 상담센터, 가정폭력 상담센터처럼 피해자들의 마음을 보살펴주는 공공기관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한공주와 같은 경험을 하는 아이들이, 청소년들이, 사회적 약자들이 많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세상에 상담센터보다 더 많은 진짜 어른들이 늘어나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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