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공공역사 학위 과정은 1976년 산타바바라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역사학과 교수 로버트 켈리Robert Kelly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공중 속의 역사 매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특정 분야의 취업을 준비시키는 학위 과정이 잇따라 생겨났다. 이런 의미에서 공공역사학과의 호황기는 1980년대였다. 공공역사자료센터Public History Resource Center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는 135개 대학에 공공역사 과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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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마침내 국제공공역사협회IFPH(International Federation for Public History)가 설립되었다. 이 단체의 목표는 역사교육과 연구를 위한 국제적 네트워크를 만들어 국가 간 교류를 지원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매년 대규모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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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밖에서 1980년대에 만들어진 역사 작업장Geschichtswerkstatt들은 “네가 서 있는 곳을 파라Grabe, wo du stehst”를 모토로 내세우며 지역사와 일상사에 눈을 돌리고 글을 썼다. 그들은 정치사와 사상사 중심의 아카데미 역사학을 비판했으며 …… 역사 작업장은 당사자들 스스로가 수행하는 민주적인 역사 연구를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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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역사 학위 과정의 개척자는 1985년 기센대학교에 설립된 역사저널리즘 석사 과정이다. 미국의 공공역사 커리큘럼에 견줄 만한 과정이 독일에서 처음으로 개설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영화와 라디오 그리고 출판물에 나타난 저널리즘적 역사 매개에 집중했다. 그 후 오랫동안 더 이상의 공공역사 교육 과정은 생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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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공공역사는 학문 분과가 되어 가고 있다. 독자적 분야로서 공공역사는 학술적 역사인식을 대중적 표현으로 풀어내는 것을 고민할 뿐만 아니라, 역사의 제시를 통해 역사 연구를 자극한다. 이로써 공공역사는 역사의 재구성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역사문화의 일부가 된다. 이러한 자극의 고전적 사례는 텔레비전 시리즈인 〈홀로코스트〉인데, 1979년 독일에서 방영된 후 “민족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와 나치 범죄 논의의 패러다임 전환”을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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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공공역사협회의 개념 정의는 다음과 같다. “공공역사는 전 세계에서 역사를 작업하는 수많은 다양한 방법이다. 즉, 현실 세계의 문제에 적용되는 역사다. 실제로, 응용역사applied history는 오랫동안 공공역사의 동의어 혹은 대체 가능한 용어였다. 최근 들어 공공역사가 학술용어로 학계에서 채택되었지만, 응용역사는 좀 더 직관적이고 자명한 용어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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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역사는 전문연구자가 아닌 광범위한 공중公衆을 지향하는 공적 역사 표현의 모든 형태를 의미하며, 또한 역사 제시를 탐구하는 역사학 하위분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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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역사는 비전문가 대중을 위해 역사를 대중적 방식으로 다듬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미있어야 할 뿐 아니라 역사의 진행을 한눈에 보여 줘야 한다. 따라서 공공역사가들은 역사학 지식을 계속 따라잡아야 할 뿐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직접 연구를 수행할 필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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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역사 표현은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흥미롭게, 즉 재미있고 쉽게 처리해 사전지식이 별로 없어도 짧은 시간에 소비될 수 있도록 설계된다. 그러나 동시에 공공역사에는 계몽적 과제가 있다. 학술 연구 결과를 다른 미디어로 옮길 때 이를 단순화하거나 자료를 추가하면서도 진지함을 유지할 방법을 꾸준히 자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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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학습의 기본이 되는 주요 원리들은 역사에 대한 공공의 논의, 즉 공공역사에도 적용된다. 그 원리란 내러티브Narativitat, 다원적 관점Multiperspektivitat, 상상Imaginati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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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으로서의 역사와 교과목으로서의 역사는 이 과거의 조각들을 의미의 맥락으로 가져오는데, 이때 역사적 서사historische Narration라는 형식을 취한다. 이러한 서사의 특징은 과거의 조각들을 이치에 맞게 정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사실관계는 포함하고 어떤 것은 생략한다는 점이다. 사실관계들은 서사의 중심을 향해 자리 잡는다. 이 서사 구조를 만드는 것은 과거의 조각에 내재된 고유성이 아니라 역사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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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역사는 독자적인 방법론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역사학과 문화 연구의 다양한 접근법을 쓴다. 여기에는 문서 사료의 전문적 취급 외에도 사물, 이미지, 영상, 소리 자료, 그리고 시대 증인 인터뷰가 있다. 역사학과의 밀접한 관련성 때문에, 이러한 사료의 분석은 물론이고 이것이 전시, 영화, 잡지, 웹사이트 등의 역사 표현에 어떻게 사용되는지 논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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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그 후의 경험을 통해, 무엇보다도 미디어를 통해 매개 과정에서 영향을 받고 중첩된다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인터뷰 대상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얼마만큼 있는지, 시간이 지나며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발전시켜 온 ‘선수’인지, 아니면 아직 인터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화자인지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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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증인은 범행의 증인 또는 목격자Tat-oder Augenzeuginnen이기도 하며, “함께 체험했으나 직접 연루되지 않은 사건을, 정치적 또는 법적 조사를 목적으로 하는 진술을 통해, 가능한 한 자세히 추체험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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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이라는 개념은 19세기에 이미 나타났고 처음에는 종교적 맥락에서 순례 성지 같은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얼마 후 괴테나 실러 같은 위인들에 헌정된 세속적 장소가 기념관으로 불리게 되었다. 1945년 이래 이 개념은 서독과 동독에서 특별히 나치 피해자를 기리는 장소에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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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의 시작을 16세기로 잡는다. 이 무렵에 훨씬 일찍부터 발달해 온 수집의 성과를 보여 주려는 생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초기 소장품은 “예술의 방Kunstkammer”으로 불렸다. 여기에는 예술작품 외에도 신기해 보이는 자연물이 수집되었고, 그래서 이후에 “신기한 방Wunderkammer”이나 “기묘한 방Kuriositatskabinett”으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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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은 나치 범죄와 정치적·사회적으로 대결한 결과이다. 1945년 이후에 수용소 생존자들이 요구하여 해당 장소에 기념판, 기념비, 기념상이 먼저 세워졌다. 여기에는 개인의 이름이나 개별 집단명 외에 다른 정보는 없었으며, 이것으로 피해자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기념 장소와 정보 전시를 겸한 최초의 기념관은 1965년 서독에서 과거 다하우 수용소 수감자들의 요구로 건립되었으며, 1966년에는 베르겐-벨젠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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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역사 수업의 전공 세미나와 교수법 세미나는 역사문화의 주제들에 초점을 맞출 때가 많고 역사학Geschichtswissenschaft의 이론과 방법론도 다룬다. 다른 역사 전공 세미나와 마찬가지로 기초는 텍스트 읽기와 토론이다. 역사를 대중에게 제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최신 연구 현황과 방법론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공공역사가에게 또 중요한 것은 역사 연구를 직접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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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의 독립성, 사료에 대한 제한 없는 접근, 연구 결과의 조건 없는 출판이 보장되어야 한다. 사료 취급 과정은 세심하고 비당파적이어야 하며, 감독하에 이뤄져야 하고 투명해야 한다. 사용된 사료와 인용된 문헌을 출판물에 명시해야 하고 저자를 적시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서술을 맥락화함으로써 역사적 맥락을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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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사업의 실제에 중요한 것은 이른바 보이텔스바흐 합의다. 1970년대에 교육학자들은 보이텔스바흐에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기 위한 지침에 합의했다. …… 이에 따르면 관람자를 감정적으로 압도하거나 특정 견해를 일방적으로 주입하면 안 되고, 관람자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해야 한다. 논쟁은 공개적이어야 하고 토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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