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희순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 날이 밝으면 손에 쥐고 있는 카빈소총을 놓고 여기를 떠날 것이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라면을 끓여 국물에다 소주 한잔을 마시고 푹 잘 예정이다. 오후 4시쯤 느긋하게 일어나 목욕탕에 가서 때 빼고 광낸 다음, 청바지와 흰 남방을 차려입고 희순을 만나러 갈 것이다. 광천동 들불에서 YWCA로 나오면서 희순과 했던 약속이라 꼭 지키고 싶었다. 달을 바라보는 곳, 그곳에서 희순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일은 망월이 뜨는 날이다. 망월은 만월이 아니다. 달맞이꽃이라도 한 묶음 들고 희순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두근거렸다.
--- p.9
“야야, 병규야 이놈아. 내가 똑 죽것다. 휴교를 했어도 그냥 서울에 있지 왜 내려와 도청으로 들어왔어. 금쪽같은 내 새끼가 여기 있으니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어. 더구나 내일 아침은 귀빠진 날이잖여…….” “알았어, 알았어 엄마. 나만 금쪽같고 귀빠진 사람인가? 여기에 있는 사람 다 금쪽같아. 내일 아침 일찍 집으로 갈게. 아무 걱정 말고 집에 가서 미역국이나 끓여놔, 응? 그거 먹고 몸보신 좀 하게.” 몸보신이라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젊은 사람의 입에서 나올만한 말이 아니었다. “병규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사냐?” “엄마, 나 오늘 안 죽어. 내일 아침에 미역국이나 끓여놓으라니까. 가서 먹는다고!”
--- p.12~13
여러분은 지난 아흐레 동안 이 도시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을 지켜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목격자입니다. 우리의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게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한 치도 흔들림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기록할 것입니다. 그 기록자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계엄군이 밀려오기 전에 어서 여기 도청에서 떠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충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어른들이 해야 합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은 살아남아 오늘의 목격자가 되어 역사의 증인이 돼주시기 바랍니다.
--- p.74~75
나보다 먼저 소나무 숲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솔방울을 줍기 시작했다. 나도 솔방울을 주우며 두 사람한테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한 걸음 다가가면 그들도 한 걸음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희순이 숲속의 작은 집으로 쑥 들어갔다. 내 머리에 떠오른 작은 집에는 연탄불이 파란 불꽃을 피워 올리며 구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희순의 이름을 불렀다. 희순이 들어간 작은 집 앞에서 동행했던 남자가 나를 돌아봤다. 그는……, 상우 형이었다.
--- p.98~99
형수가 전남대 앞에서 함께 산부인과에 다니던 임산부 친구가 공수부대의 총질에 그만 즉사하는 것을 봤어. 이름이 ‘최 뭐’라고 했는데……. 엄마가 죽자, 배 속의 아이가 격렬하게 꾸물꾸물 움직이는 게 보이더래. 그래서 울며 공수한테 항의를 했더니 그만……. 소총에 매단 대검으로 젖가슴을 푹 찔러버렸다는 거야. 지금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있어. 피를 많이 흘렸어. 엄청나게 수혈을 받아 간신히 목숨은 구했는데 여전히 사경을 헤매고 있어. 아기를 낳아야 하는데 젖가슴이 없어…….
--- p.138
공장에서 일하는 공돌이가 어떻게 사람답게 살 수 있단 말인가? 버스 안내양이 어떻게, 방직공장의 공순이들이 어떻게, 밤새 미싱을 돌리다가 손톱 위로 바늘이 드르륵 지나가는 공순이가 어떻게, 프레스 선반에 손가락이 잘려나간 공돌이가 어떻게, 고구마 값이 폭락한 농부가 어떻게, 농가 부채에 시달리다 밭고랑에서 농약을 먹고 자살하려는 농부가 어떻게……? 중학교도 못 가고 도시로 와서 온갖 공장을 다니며 살아야 하는 근본적 이유가 부모를 잘못 만나 가난하게 태어난 탓에 있다고 생각했다.
--- p.159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고 어떤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텅 빈 상태로 고요했다. 다만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고, 당겨야만 한다고 속다짐만 해댔다. 나의 왼편에는 상우 형, 오른편에는 현철 형, 또 그 옆에 용철 형이 경찰청을 향해 총구를 향하고 있지만,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당겨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현철 형은 군대에서 특등 사수였다고 자랑을 그리도 하더만 가늠자만 바라볼 뿐 다가오는 공수대원을 향해 끝내 총을 쏘지 못했다.
--- p.220~221
내 눈으로 보이는 이 상황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흉몽도 악몽도 아니었고, 지독한 가위에 눌린 듯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고자 해도 비명조차 나오질 않았다. 공수대원은 병규를 거꾸로 끌고 계단을 내려갔다. 한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병규의 머리가 수박처럼 툭툭 깨졌고 피가 남았다. 나도 모르게 굳어 있던 몸이 풀렸다. “병규야! 야,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아, 너희들이 사람이냐!” 나는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벽을 짚고 일어나 절규했다. 나는 카빈소총의 탄창을 친 다음 공수대원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 p.230
공수대원 하나가 두 손을 번쩍 들고 내려오는 고등학생들을 가리키며 보고했다. 집에 돌아가라고 해도 끝까지 남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눈에 익은 학생들이었다. 공포에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오호, 살려준다니까 그제야 항복을 했다고?” 소대장이 물었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공수대원이 대답했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이, 호적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벌써부터 빨갱이질이야? 이런 것들은 아예 일찌감치 싹을 잘라야 해. 야 새끼들아, 살려줄 줄 알았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대장이 학생들을 향해 드르륵 총질을 해댔다.
--- p.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