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길을 혼자 걷다 문득 도깨비가 생각난 적 있는가? 만일 정말로 도깨비가 나타난다면 도와달라고 소리쳐야 할까? 신고해야 할까? 맞서 싸워야 할까? 생각만으로도 혼란스러운 마음은 몸에도 영향을 미처,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만든다. 게임을 할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어차피 게임은 허구이고 게임의 주인공이 아무리 위기에 처해 있다 해도 현실의 삶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는데도 말이다. 분명 게임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게임하는 우리는 긴장하고, 흥분하고, 때로는 억울해하고 즐겁기도 하다.
밤길에 갑자기 나타난 도깨비와 게임의 공통점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강렬한 체험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주 쉽게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아무리 말해도 아이가 정리정돈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말을 듣지 않는 걸까? 대화할 때도 그렇다. 상대방에게 아무리 열심히 이야기해도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잘 전달되지 않는다. 어째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비즈니스 현장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기획하고 개발한 상품과 서비스는 아무리 쓸모 있고 편리한 것일지라도 잘 팔리지 않는다. 어째서 이런 좋은 물건이 팔리지 않는 걸까?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고,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줬으면 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주었으면 하는 당신의 바람에 답하고자 이 책을 썼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 스스로가 그것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체험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것이 너무나 알고 싶다. 틀림없이 당신도 같은 마음일 것이라 생각한다. (…)
소개가 늦었다. 나는 ‘닌텐도’에서 게임기 기획을 담당했고, 가장 깊이 관여한 상품은 게임기 ‘위Wii’다. 위는 전 세계에 1억 대가 팔린 히트 상품이 되었지만 위 자체는 사실 재밌는 장치가 아니다. 게임기는 어디까지나 이용자들이 게임을 재미있게 체험하게끔 해주기 위한 도구다. 당시 나는 ‘게임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가’에 대한 논의와 분석, 연구를 거듭하여 상품 기획에 활용하였다.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경험을 통해 배우고 실천해온 ‘마음을 움직이는 체험을 만드는 방법’이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상품의 기능과 성능만으로 상품을 구매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마음을 움직이는 체험을 제공해주는 상품과 서비스를 원한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어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핵심이다. 이 책에서는 마음을 움직이는 체험을 만드는 방법을 ‘체험 디자인’이라고 지칭하고, 비즈니스와 실생활에서도 응용할 수 있는 3가지 형태로 정리하였다.
--- 10~12쪽, 프롤로그
‘도대체 어떤 게임이 잘 팔릴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재밌어 보이는 게임이 잘 팔리겠지.’ 당연하다. 재밌어 보이는 게임이 잘 팔린다. 그렇다면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잘 팔린 슈퍼 마리오도 한눈에 ‘재밌겠다!’고 느껴지는 게임일 것이다.
실험을 하나 해보았다. 꾸밈없이 대답할 것 같은 아이들을 불러 모아 슈퍼 마리오의 도입부 화면을 보여준 후 ‘재밌어 보이니?’라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린 게임을 앞에 두고 발칙하게도 이렇게 대답했다. “재미없어 보여.”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게임이 재미없어 보인다니, 정말 당황스럽다. 정말로 만에 하나 슈퍼 마리오가 재미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슈퍼 마리오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게임이 될 수 있었던 걸까?
--- 22쪽, 직감 디자인: 도입부 화면이 재미없는 게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눈앞의 세계로부터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인다. 슈퍼 마리오에서 ‘마리오가 오른쪽을 향해 있다’, ‘왼쪽에 산이 있다’ 등이 정보가 된 것처럼 말이다. 플레이어의 뇌는 이러한 정보를 통해 ‘오른쪽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라는 가설을 만들어내는데, 여기서 플레이어가 무의식적으로 깨닫는 것이 있다. 지금 자신이 쥐고 있는 컨트롤러에 틀림없이 캐릭터를 오른쪽으로 가게 하는 버튼이 있음을 말이다.
생뚱맞지만 우측 버튼의 존재를 알아차린 플레이어는 이제 그 버튼을 누르지 않고는 버틸 수 없게 된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가설이 단 하나의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확인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우측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세운 가설을 강제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이다.
게임은 재미있어서 하는 게 아니다. ‘나도 모르게’ 생각이 나고, ‘나도 모르게’ 손이 가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항상 가설을 찾아내어 우리가 그대로 실행하게끔 만들려고 한다.
--- 60쪽, 직감 디자인: 재밌겠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
플레이어는 드퀘 1 도입부에서 8개의 커맨드 중 5개를 학습하여 간신히 왕의 방에서 탈출했다. 이후로도 게임은 학습할 것 천지다. 2개의 마을과 2개의 동굴, 2개의 다리를 넘은 신대륙의 끝에서 부비부비가 등장하는데,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매우 험난한 것이다. 남은 3개의 커맨드인 세기, 도구, 주문을 구사해야만 돌파할 수 있다.
원래는 검만 다룰 수 있었던 용자도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도구와 마법을 활용하여 모험하는 용자로 성장하면서 게임은 제법 그럴듯한 ‘검과 마법의 모험 이야기’로 거듭난다. 용자의 성장… 참으로 바람직하다. 하지만 플레이어는 지금껏 커맨드의 사용법, 전략 세우기 등 전문 지식을 끝없이 배우기만 했다. 비유하자면 쉬는 시간 없이 종일 공부만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피로와 싫증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피로와 싫증, 이것이 바로 직감 디자인의 치명적인 결점이다.
--- 114쪽, 놀람 디자인: 직감 디자인의 결점
여기서 드퀘 4가 도입한 것이 바로 카지노다. 마왕은 여전히 온갖 무도한 짓으로 사람들을 살육하고 있는데, 마왕을 무찔러 세계의 평화를 되찾아야 할 용자가 카지노에 죽치고 있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그러나 이것이 드퀘 시리즈의 디자이너가 내린 결단, 의도적인 체험 디자인이다.
카지노에는 슬롯이나 포커 같은 도박이 나열되어 있고 이기면 얻을 수 있는 코인으로는 다양하고 강력한 무기와 방호구를 교환할 수 있다. 지금껏 수많은 몬스터와의 전투를 부지런히 거듭하여 차곡차곡 돈을 모아 무기나 방호구를 구입해온 플레이어에게 일확천금으로 장비를 제공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착실히 돈을 모아 온 플레이어들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디자이너의 목적이다. 노력을 거듭하고 배우면서 모험하려는 플레이어의 착실함을 카지노는 의도적으로 빼앗는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플레이어에게 피로와 싫증이 축적되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피로와 싫증이 한계를 넘어 플레이어가 게임 자체를 그만두는 것. 그것이 바로 최악의 상황이다. 따라서 카지노는 일부러 모험을 잠시 멈추게 하기 위해 디자인된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일시 정지를 해제하고 플레이어가 모험으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물론 돌아오게 할 장치도 준비되어 있다. 카지노에서 한바탕 즐기고 나면 플레이어의 손에는 모험에 도움을 주는 장비와 아이템이 남는다. 마음껏 즐긴 후의 개운함에 더해 손에는 강력한 장비와 아이템까지 주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플레이어는 자연스럽게 다시 모험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 144~145쪽, 놀람 디자인: 카지노의 역할
‘라스트 오브 어스’는 현대를 무대로 한 액션 게임이다. 동충하초처럼 인간에 들러붙어 그 사람을 좀비로 만들어버리는 불가사의한 균으로 인해 존망의 위기에 처한 미국, 감염 확대로 패닉에 빠진 가운데 혼자 키운 사랑하는 딸을 잃고 절망 속에서 살아온 주인공 ‘조엘’의 운명은 20년 후, 어느 날 갑자기 바뀌기 시작한다. 전 세계에서 균에 내성을 가진 오직 한 사람, 잃어버린 딸과 같은 나이인 14살 소녀 ‘엘리’와 만나게 된 것이다. 종말을 향해 가는 세계를 여행하는 둘은 어떤 ‘우리의 결말The Last ofUs’에 이르게 될까?
굉장히 묵직한 내용이다. 이렇듯 복잡하게 얽힌 내용은 등장인물의 대사와 영상만으로 전달된다. 상황을 설명해주는 요소도, 화면에 나타나는 문자도 거의 없다. 비주얼은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묵직한 이야기를 대사와 영상만으로 전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편, 바람의 여행자는 더욱 날카로운 디자인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게임 속에 문자는커녕 말 자체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바람의 여행자의 줄거리는 이렇다. 처음 보는 옷으로 몸을 감싼 주인공은 갑자기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에서 눈을 뜬다. 멀리 보이는 것은 산꼭대기뿐이고, 주인공은 그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산이 목적지임을 나타내는 확실한 정보도 없다. 우연히 눈에 띈 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을 뿐이다. 가뜩이나 수수께끼로 가득한 설정에 작중에는 일절 문자가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사로 된 설명도 전혀 없다.
이렇듯 신선한 디자인으로 바람의 여행자는 수많은 게임상을 수상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수많은 상 모두가 이 게임을 ‘이야기성이 뛰어나다’고 평가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 게임은 문자나 대사 없이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도대체 이야기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솟구칠 것이다.
--- 168~169쪽, 이야기 디자인: 도대체 이야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정이 강하게 움직였는지 아닌지로 결정된다. 호들갑스럽게 밝히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당연한 얘기다. 어떤 체험에서 감정이 움직였다면 그 체험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체험→감정→기억’의 흐름은 늘 우리의 인생을 움직이고 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지금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당신의 감정을 강하게 뒤흔들었던 체험이었을 거라고. 사람
들이 기억하고 있는 게임 속 명장면들에는 반드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체험 디자인이 숨어 있다. 또한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게임 장면들에는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체험 디자인이 숨어 있다.
체험이 현재형이라면 기억은 과거형, 체험은 다시 기억의 현재형이다. 당신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것에서 당신의 체험 디자인은 시작된다. 기억만 있으면 된다. 당신이라는 사람의 감정을 확실히 움직였던 체험, 즉 기억을 든든한 토대로 하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체험을 디자인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 274쪽, 체험 디자인: 마음이 움직였다는 증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