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다짐한 사람들이 왜 더 오래 살아남는 줄 알아? 모든 생명체는 살아야겠다는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욕망이 뒤틀리면 지구의 흐름으로부터 비껴나가게 되는 거야. 날아오던 총알도 그 기류에 휩쓸려 빗나가게 되는 거지. 죽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더 오래 살게 돼. 사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경계에서. 아내를 따라가려고 목을 매달았을 때는 문손잡이가 떨어졌 어. 총알을 사서 돌아오던 길에는 가방을 도둑맞았고, 수면제는 아내가 착각하고 담아 둔 비타민이었어. 그게 비타민인 걸 알았을 때 내가 죽을 수 없다는 걸 알았지. 내가 죽지 못하게 아내가 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이제 살고 싶어. 이번 전쟁이 끝나면 더는 전장에 발을 들이지 않을 거야.
--- 「천선란,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중에서
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곳이 전장이었다. 적과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더는 겨냥할 수 없으므로. 그것의 손에는 보라색 꽃이 쥐어져 있었다.
--- 「천선란,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중에서
만약에 누군가 이 기록을 보고 있다면 그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어쨌든 반가워요. 이것만 알아줬으면 해요. 여기에 사람이 있었어요. 좋아요, 좋아. 당신이 누구라도 좋다. 대신 내 부탁을 들어줬으면 한다.
--- 「박해울, 요람 행성」 중에서
리진이 매일같이 앉아 있었던 그 자리는 미지근했다. 햇볕이 적당히 자리를 데웠지만, 서늘한 날씨 탓인지 그렇게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는 리진이 보았을 풍경을 응시했다. 넘실거리는 검은 물결 저 멀리, 그가 말했던 숲이 보이는 듯도 했다. 그는 그들이 거기 살아 있기를 마음속으로 바랐다. 그때, 수현은 똑똑히 들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울음과 둥둥 울리는 북소리를. 그는 중얼거렸다. “어떻게 헛된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 「박해울, 요람 행성」 중에서
“이런 말 우습지 않아? 상황 봐서. 두고 봐야지. 열어놓자…. 난 다른 가능성은 전부 닫고 싶었어. 선택할 필요가 없었어. 너만 좋았으니까.” 연음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여기서는 필요 없는 말이었다. “지구로 돌아가면 우린 또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될 거야. 그럼 너만 좋았다는 말 대신 너도 좋았다고 말하게 될 거야.” “왜 그래야 하는데!”
--- 「박문영, 무주지」 중에서
연음은 땅에 누워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그는 무주지 사람들이 처음에 품은 질문을 사랑했다. 열린 강령, 양육 수칙보다 더 자주 중얼거리던 말이었다. 자신이 아는 것 이상을 꿈꾸지 못하는 인간이 인간일까. 자신과 이미 닮은 것만을 사랑하는 존재가 아름다울까. 연음은 그런 물음을 조용히 곱씹어보던 시간이 좋았다.
--- 「박문영, 무주지」 중에서
미아는 양로행성에 도착한 뒤 거듭 확인했다. 방치된 미래에서도 삶은 지속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시작한 인연을 소중하게 키워가고, 평생의 빚을 성실히 갚으며, 매일 공들여 이별하는 것으로 암보다 독한 최후의 형벌에 대비하면서.
--- 「오정연, 남십자자리」 중에서
이제 메이와 해리는 매일 저녁과 새벽, 함께 마당에 나와 앉아 해와 달이 천구를 가로지르는 모습을 감상했다. 낮과 밤의 시작과 끝이 포개지고 접히면서 서로의 뒤를 좇았다. 매일의 기도는 항상 같았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죽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 「오정연, 남십자자리」 중에서
사람들이 만나는 나는 매번 다른 모습이야. 음성, 혹은 텍스트로,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형태를 원한다면 그들이 보고 싶은 모습을 보여줘. 지금 당신이 보는 나도 그렇게 만들어진 거야. 대부분은 당황하거나 왜 이런 모습을 내가 원하는 것일까 이유를찾기 위해 정신이 팔리는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납득하거나 혹은 어떤 형태든 아예 신경 쓰지 않는 이들도 있어. 이들은 존재 그 자체에 집중해. 지금 여기, 2번 출구처럼. 이곳은 영혼, 의식, 정신의 집합체야. 우리에게는 시공간을 벗어나 존재와 존재로서 서로를 알려주는 이런 관계들이 소중해.
--- 「이루카, 2번 출구에서 만나요」 중에서
엄마의 흰 머리칼과 유독 웃음이 많았던 얼굴에 알맞게 자리 잡은 주름을 기억하고 있어. 마지막 엄마의 말을 듣지 못한 것과 네가 외계물질 연구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엄마에게 들려주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 아프지만, 누구보다 밝게 빛나던 눈동자와 엄마의 주름에 정확히 들어맞았던 웃음을 떠올려. 엄마가 눈감을 때 지었던, 평온한 얼굴에 머물던 미소. 너는 생각해. 그걸로 충분하다고. 나는 알아. 너의 주파수가 완성되었고, 이제 2번 출구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 「이루카, 2번 출구에서 만나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