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은 전통적이고 통합되어 있고 합리적이고 금욕주의적인 자아, 즉 욕망의 폭력에서 자유롭다고 추정되는 자아를 받아들이는 페미니즘의 경향을 동요시킬 수 있다. 반면에 페미니즘은, 정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부당한 사회구조에 적응하도록 조장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정신분석의 경향을 뒤흔들 수 있다.
--- p.13, 「서문」 중에서
페미니즘은 라캉주의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그 목표를 재검토해야 한다.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가부장제 문화가 아니라 ‘죽은 아버지의 법’을 실제의 살아 있는 남성의 법칙으로 바꾸는 생물학주의적 환원이다. 살아 있는 남성의 사기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 페미니즘은 언어학 이론과의 교류를 통해 본래의 대담함으로 돌아간 정신분석을 받아들여야 한다.
--- p.41, 1장 「‘정신분석과 페미니즘’」 중에서
독일어 단어의 사용은 독자들에게 성 정체성은 항상 자체의 문법을 가진 주어진 언어 내에서 담당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겨지는 것은 그 정체성의 임의성을 가시화하는 방식이다.
--- p.61, 2장 「남근적 균형에 관하여: 라캉의 사고」 중에서
하지만 ‘앙코르’가 또 다른 ‘앙코르’만이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을 반복하다’라는 의미일 때 남근적 질서는 가장 효과적으로 위협을 받는다. ‘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어떠한 확정적인 답변이든 그것은 질문을 폐쇄로 되돌리기 위한 노력이다. 폐쇄가 유지될 수 없게 하는 것은 미결된 문제로서 그것에 대해 계속해서 묻는 것이다.
--- p.79, 3장 「인기 많은 남자」 중에서
어머니의 불충실함에 대한 어떠한 의혹이라도 자의적으로 부여되는 아버지의 이름을 배반한다. 어머니의 불충실함에 대한 아주 작은 낌새라도 (…) 라캉이 상징계(아버지의 이름의 영역)라고 부르는 것을 드러내도록 위협한다. 그렇다면 불충실함은 아버지의 이름을 약화시키는 페미니즘적 실천이다. 불충실한 읽기는 저자에게서, 권한이 있는 존재에게서 벗어나고, 재생산으로서, 재현으로서 지속되지 않는 것을 산출한다. 불충실함은 결혼 제도, 상징계, 가부장제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그것들을 구멍 내고 훼손한다.
--- p.99-100, 4장 「‘앙코르’ 앙코르」 중에서
이리가레의 전략은 일종의 읽기로, 다시 말해, 텍스트를 다양한 크기의 조각들로 분리하고, 인용하고, 그런 다음 다양한 질문과 연상을 통해 논평하는 자세히 읽기다. 이리가레는 결코 프로이트의 텍스트의 의미를 요약하지도 않고, 자신의 모든 논평과 질문과 연상을 통일된 표현, 일관성 있는 해석으로 묶지도 않는다. 그녀의 논평은 결론 없는 부분들과 답변 없는 질문들로 가득하다.
--- p.113, 5장 「아버지의 유혹」 중에서
이리가레는 남근적인 성 이론, 남성의 성 과학이 동성애적이며, 타자성을 배제하는 동일성의 섹슈얼리티, 정체성의 섹슈얼리티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성애는, 그것이 남성들 사이의 여성 교환임이 폭로되면, 매개된 형태의 동성애임이 드러난다.
--- p.163, 6장 「무례한 질문들」 중에서
‘남근’과 ‘음경’을 구분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정신분석과 정치를 구분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다시 만난다. 음경은 남성에게는 있지만 여성에게는 없는 것이고, 남근은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없는 권력의 속성이다. 하지만 권력의 속성이 음경을 가리키고 (상상계 영역에서?) 음경과 혼동될 수 있는 남근인 한, 이러한 혼동은 남성에게는 권력이 있고 여성에게는 없다는 것이 타당한 듯 보이게 하는 구조를 지지할 것이다. 그리고 정신분석가들이 ‘남근’과 ‘음경’의 구분 가능성을 옹호하는 한, 그들은 자신들의 담론이 성적 불평등과 무관하고 정치와 무관하다는 믿음으로 자신들의 ‘남근’을 고수할 수 있다.
--- p.185, 7장 「변덕스러운 욕망에 대한 글쓰기」 중에서
각자가 권력을 행사하고 그리고 비판해야 한다. 각자가 어머니인 동시에 딸이어야, 대문자 아버지인 동시에 여성이어야 한다. 유아적이고 광대한 수동성의 마비 상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하지만 경직된 주체성의, 정반대의 마비 상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권력을]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멈출 수도 없고 멈춰서도 안 된다. (…) 권력을 행사하고 그리고 비판하는 것은 탈남근화하는 것, 남근을 장악하고 그 장악을 뻔뻔한 행동이라고, 사기라고 밝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이중적인 담론이 필요하다. 주장하고 그런 다음 질문하는 담론 말이다. 누가 이런 이중성이 가능할까? “아마도 여성…….”
--- p.227-228, 8장 「남근적 어머니: 프로이트적 분석」 중에서
여기서 클레망의 상징계 또는 식수의 상상계를 선택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 실제로 두 사람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있다는 사실은 대립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들을 깨뜨린다. 히스테리 환자의 역할처럼, 가정교사의 역할처럼, 우리는 모호함을 받아들이는 것을, ‘open 또는 shut’을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로 만드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 p.276, 9장 「도라에게 가는 열쇠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