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특별히 좋은 소식(the good news) 혹은 많은 번역본의 표현대로 ‘복음’(the gospel)에 집중하고 싶어 한다. 이 편지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복음’이란 단어는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 저변에 짙게 깔려 있다. 여기서 그는 이 ‘복음’이 실제로 무엇인지 설명한다. 복음에는 바울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 주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그는 이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일을 위하여 “따로 세움”을 받았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온 세계를 보고 그 가운데 우리가 속한 곳을 찾을 수 있는 지도를 만들어 주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5절과 6절의 역할이다. 여기서 복음은 로마의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온 세계가 왕이신 예수를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 「롬 1:1-7 새 왕에 대한 좋은 소식」 중에서
구원은 아주 익숙한 단어라서, 우리는 그 의미를 잘 안다고 쉽게 생각하여 구원을 당연시할 수 있다. 구원이라는 말을 접할 때 우리는 보통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신약 전반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바울은 좀처럼 그렇게 말하는 법이 없다. 물론 신약과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백성을 죽음에서 구출하실 것을 믿는다. 죽음은 패배한 원수여서, 죽음에서 오는 타락과 부패가 우리의 마지막을 주관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가 종국에는 육체가 없는 영의 상태로 하늘에 있을 것이란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창조 세계를 타락과 부패에서 구출하실 것이란 의미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백성에게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은 새로운 몸을 주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서 영광스럽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다. 이는 이 편지의 논의가 전개되어 가는 목표점 가운데 하나로, 8장을 한 번만 훑어보아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구원의 완전한 영광은 미래에 나타나겠지만, 바울은 자주 이 ‘구원’이 단지 미래의 일만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구원은 현재를 향하면서, 사람들을 죄의 상태에서 구출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괴로움과 박해에서 구출한다. ‘구원’은 미래의 희망인 동시에 현재의 실재다. 뿐만 아니라 이 구원이 사람들의 삶으로 침입할 때, 그 구원은 그들이 뒤돌아볼 수 있는 과거의 사건이 된다. 그들은 구원받았고, 구원받고 있으며, 구원받을 것이다.
--- 「롬 1:14-17 좋은 소식, 구원, 하나님의 정의」 중에서
바울의 글 중에 최후 심판의 모습을 가장 잘 개괄해 주는 곳이 바로 2장이다. 흔히 신약에서는 자비만 찾아내는 반면에, 심판은 ‘구약’의 개념이라고 가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서투른 풍자는커녕 순전한 허구다. 물론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각별하고도 놀라운 사랑을 강조한다. 바울도 이것을 이후의 내용에서 찬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거부한다면(사랑의 논리에는 사랑이란 언제나 거부될 수 있다는 전제가 있다) 도리가 없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랑 많으신 창조자로서 세상을 바로잡는 일에 전념하신다. 거기에는 인간도 포함된다. 그러나 앞의 본문에서 말한 비인간적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은 재앙을 자초하고 있다. 돌아올 기회가 충분한데도 악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재앙을 구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다른 대안은 없다.
--- 「롬 2:1-11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임할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 중에서
4장 마지막 절은 바울이 5-8장에 걸쳐 말하려는 내용을 예측하고 있다. 바울은 1-4장 전체의 대단원에 담긴 모든 논의를 예수님을 언급하면서 마무리한다. 이는, 우리가 바울이 예수님을 잊었다고 생각할 경우에 대비하여, 예수님을 슬쩍 끌어들여 언급하는 경건한 제스처 정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논의 전체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바울의 생각이 어디에서 나왔고 그 힘이 무엇인지를 다시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지금까지 다룬 네 장 전체의 밑에 깔린 것들을 결합한다.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사람들 손에 넘겨지셨다. 달리 말하자면, 세계를 손상시킨 인간의 엄청난 죄악이 함께 몰려와서, 마땅히 받아야 할 법의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처리되셨다(3:25; 8:3). 예수님은 우리의 칭의를 위해, 곧 우리가 ‘의롭다’는 선고를 받게 하시려고, 우리가 언약의 구성원이라는 확정을 받게 하시려고 일으켜지셨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켜지셨을 때, 하나님은 “그는 과거나 현재나 진짜 내 아들이다”(1:4)라는 말씀은 물론, “그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진짜 내 백성이다”라는 말씀도 하신 것이다.
--- 「롬 4:18-25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 중에서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는 한 부류의 사람에서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이동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해 다시는 원래 방식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바울은 대답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는 메시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서에서 처음으로 바울의 핵심 신념 가운데 하나를 만난다. 곧 메시아가 자기 사람들을 대표하시기 때문에, 메시아께 해당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해당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메시아께로’ 나아가거나 ‘메시아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혹은 ‘메시아와 함께’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말하는 이유다. 이는 우연한 말장난이 아니다. 그런 문장에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메시아’를 대신할 수는 없다. (물론 바울은 예수님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메시아라고 믿는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주장은 그 논리가 다음과 같은 가정을 바탕으로 작동한다는 것이 내 말의 요지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단순히 사사로운 개인 곧 나사렛의 예수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자신 안에 모두 총괄하신 ‘기름 부음 받은 자’이시다.)
--- 「롬 6:1-5 세례를 통해 죄의 상태에서 떠나다」 중에서
5장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진 전체 단원은 확신에 대한 논증이다. 이 확신은 종종 조롱을 받는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은 공상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이 얼마나 교만한가! 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 그러나 이러한 비웃음이 쏘는 침은 제거될 수 있다(그러한 비웃음은 분명한 요점을 제시하지도 않은 채 시기심에서 생길 수도 있다). 전쟁에 나가면서 자기편에 신의 가호를 비는 군대를 생각할 때, 31절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이라는 요구는 사탕발림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것이 역경과 박해와 위험과 죽음에 맞서 온 어느 사도의 요구라면 아주 다르다. 5:1-5과 8:17에서도 보았듯이, 희망이 우리를 낙심케 하지 않게 해 달라는 요구는 우리가 메시아의 고난에 참여할 때에만 할 수 있는 요구다.
--- 「롬 8:31-39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