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국에 웬 여행 이야기?’
해외여행과 국내여행 모두 어렵다. 여행사는 무기한 휴업 상태. 우리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주던 항공업계도 멈췄다. 휴가철이 되면 몇 시간씩 줄 서던 공항, 매년 늘어나는 해외여행객, 세계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던 한국인. 모두 다 옛말이 되었다. 여행 향한 우리의 사랑이 일순간에 ‘멈춤’ 당했다. 전 세계적 위기 앞에 ‘여행’ 따위 운운하는 것이 대수롭지 않아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여행 이야기를 쓴다. 내게 여행은 단순 ‘놀고먹는 시간’ 이상이었다. 특별히 잘난 것도 없었던 학창시절, 부모님과 선생님 말씀은 잘 들었지만 하고 싶은 일은 몰랐다. 대학만 가면 하고 싶은 일이 ‘뿅’하고 떠오르는 줄 알았다.
‘공부 잘하면 잘 살 수 있다.’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는데 결국 잘 사는게 뭔지도 모르겠다. 달려야 할 이유가 사라진 스무 살. 끝없는 구덩이에 빠진 것 같았다. 누군가는 스무 살이 인생 황금기라는데, 그때 나는 모든 것이 막막했다. 하고 싶은 일은 뭔지, 아니 당장 남아도는 시간에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다.
남들이 한 번쯤 가본다기에 떠난 여행이었다. 최초로 가슴 뛰는 순간을 마주했다. 낯선 상황에서 나는 알던 것보다 좀 더 대단했다. 매번 나를 발견하는 기쁨에 멈출 수가 없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빼고 모든 대륙에 발 도장을 찍었다. 살 이유가 없어 그만 살고 싶던 스물두 살. 돌아보니 세상이 더 보고 싶어서, 그만 살기에는 내가 꽤 괜찮아서, 더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여행이 내게 나를 알려줬다.
--- 「들어가는 글」 중에서
인도에서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죽겠는 감정이 하루에도 수십 번 요동쳤다. 인도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 콜카타 공항에서 비행기 타기 전 화장실을 들렀다. 측정 불가 수준으로 시커먼 인도 공기의 미세먼지가 온 얼굴과 콧구멍에 들러붙었다.
‘마지막까지 이 꼴이구먼.’
꼴 보니 참을 수가 없다. 물로만이라도 벅벅 얼굴을 문질러 내고 고개를 들었다.
옆에서 손 씻던 젊은 인도 여자가 내게 물었다.
“인도에 여행 온 거니?”
“아니, 여행은 끝났고 이제 집으로 가는 길이야.”
“인도여행에서 무엇을 얻었니?”
“…….”
글쎄, 처음 듣는 그 같은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에 앉아 생각해 봤다. 예정시간보다 열두 시간 늦게 목적지에 도달한 아그라행 기차도, 그만큼이나 연착될 줄은 모르고 빈손으로 올라탔다가 인도사람들에게 과자 얻어먹던 일도, 바라나시 소똥 밭길도, 그보다 더 더러운 갠지스강물도, 처음에 100루피 불렀다가 한 바퀴 돌고 오면 5루피까지 떨어지는 미친 흥정도, 그런데도 더는 화 나지 않기 시작한 순간도, 부처님도 인도에서 이래서 해탈하지 않았을까 싶다는 생각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미워할 만한 이유가 넘쳐나는데도 웃음이 났다. 끝내, 다 잘되었기 때문에.
--- 「제1장 여자 나이 스물셋 : 2. 경험하라」 중에서
카메라가 고장 났을 때 여행이 끝난 것만 같았다. ‘완벽한 계획’에 없던 사건이 발생하자 당황했다. 다시 그 계획에 다가가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머리에서 열나게 고민해도 해결되지는 않았다. 문화가 다른 곳에서 내 상식대로 해결하려 달려드니, 풀릴 리가 없지. 완벽한 계획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기에 여행이 즐겁다는 진리를 몰랐다. 현지 상식에 맞추며 유동적으로 행동하고, 안 되는 일은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했다.
그깟 카메라 때문에 이탈리아의 멋진 풍경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얼마나 날렸을까. 안되면 버릴 마음으로 경통 잡아 당겨준 아저씨처럼, 단순하게 생각하는 편이 더 도움이 될 때가 있었다. 몇 수 앞일을 철저히 계산하며 다니자면, 여행이 힐링 혹은 자기 성찰 기회가 아닌 고행의 시간이 되기도 했다. 보챌수록 원하는 것에서 멀어지고야 만다는 진리를, 그때는 몰랐다.
--- 「제2장 홀로서기의 시작 : 4. 완벽한 건 없구나」 중에서
동물원과 다르고 세상 어디와도 다르다. 세렝게티 초원에서 만난 야생동물은 다큐멘터리 화면과 달리 오감으로 다가왔다. 버튼 누르면 시작되는 영상과 달리 찾아가야 하고 오래 기다려야 한다. 불편했지만 그들의 작은 움직임에도 저 아래서부터 탄성이 나왔다. 일상이 문득 힘없게 느껴질 때 세렝게티에서의 크리스마스를 반추해 본다.
‘그래, 나 사자도 만나고 온 사람이지!’
--- 「제3장 아프리카, 감동의 날들 : 7. 세렝게티에서 크리스마스를」 중에서
‘하늘과 땅이 분홍인 적이 있었던가?’
세상이 낯선 색으로 덮였다. 오묘한 감정이 피어오른다. 하늘과 땅에 대칭을 이룬 구름 날개가 감각을 혼란하게 한다. 뇌가 이성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장화 발로 물을 첨벙거리며 어디까지가 땅인지를 확인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아름다운 찰나만 기억에 남지만 사실 이동 시간,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다. 그런데도 집에 오면 막상 고생했던 순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힘들던 과테말라 역시 결국은 그럭저럭 괜찮은 추억이 되었다. 너무 춥고 길던 밤보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던 우유니에서의 두 시간이 더 강렬한 것도 그렇다. 여행에서 얻은 추억 떠올리며 현생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긴 인내 끝에 달콤한 열매가 떨어질 것이다. 한 조각의 열매를 맛보며 우리는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 「제4장 이번엔 남미야 : 7. 이 순간을 위해 참을 수 있어」 중에서
멋진 관광지, 작품, 건물, 자연은 자체로 독특한 영감을 줬다. 동시에, 멈춰선 일상에서 천천히 눈에 들어온 것도 그 못지않은 가르침을 줬다. 늘 특별할 수는 없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노력하는 사람을 만나고, 당연함을 넘어선 고마움을 느꼈다. 현재를 즐기며 살 줄 아는 사람들에게 ‘오늘을 사는 법’을 배웠다. 멈춰선 하루에서, 돌아와서 열정적으로 살아갈 힘을 얻었다.
--- 「제5장 평생 여행할 수는 없을까 : 2. 눌러앉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중에서
떠나보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펼쳐진다. 사소한 해프닝부터 여행의 방향을 바꿀 사건까지. 설렘, 떨림, 숨 막힘, 우정, 사랑, 이별, 기쁨, 슬픔, 당황, 짜증, 분노, 만족 등. 수많은 감정을 겪는다. 시련과 극복의 과정을 빠르게 겪으며 다양한 감정을 체험하는 여행. ‘인생 백신’을 맞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백신 맞고 면역력을 만들어 간 사람은 살아가며 더 큰 고난이 닥쳐와도 이겨 낼 수 있다. 인생 백신은 자신을 발견하는 것과 더불어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 「제5장 평생 여행할 수는 없을까 : 3. 인생 축소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