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때쯤이었던 같습니다. 자연 시간에 ‘광년’(光年)이라는 개념을 배웠습니다. 빛은 1초에 30만 km를 간다고 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태양계가 속해 있는 은하계의 지름은 10만 광년이라고 했습니다.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주에는 이런 은하계가 몇 천 억 개가 있는지 셀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머리에 지진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광년이라는 빛의 속도로 무한대의 우주를 떠도는 두렵고 고독한 우주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은하계 안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먼지 같은 존재인 태양계, 그 태양계 중에서도 가장 작은 별인 지구, 그 지구 한 귀퉁이에서 한 점도 안 되는 시간을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누구인가’를 생각하다가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에 갇혀 버렸습니다. 대학 시절 철학이라는 또 하나의 고독한 여행이 시작되었지만, 거기에도 답은 없었습니다. 의문 부호만 더 늘어났습니다. 허무만 더 커졌습니다. 성경은 과학이 만들어 낸 우주의 미아, 실존주의 철학이 만들어 낸 피투성(被投性)의 존재였던 필자를 우주의 미궁으로부터, 피투성의 수렁으로부터 건져 올린 ‘단 한 권’의 책입니다. 무한대의 우주로부터 줌 아웃되는 절대 고독, 완전한 ‘무’로 돌아가야 하는 절대 허무로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 생명의 풍성함과 가장 의미 있는 삶의 존귀와 가치와 기쁨으로 끌어올린 절대 진리의 책입니다.
계시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먼저 말씀하시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만나시고,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시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류에게 자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계시되고 전달되도록 말씀을 기록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기록된 문서인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하나의 ‘큰 이야기’로 주셨습니다. 전체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타락한 창조 세계 전체를 새 창조하시기 위해 점진적으로 활동하시는 긴 구속의 여정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하나의 이야기로서 갖는 통일성은 각권의 독특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66권의 책들이 함부로 넘어갈 수 없는 한계를 표시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역사적 정황에서, 다양한 저자와 다양한 문학적 장르를 통해 기록된 책들의 모음이지만, 66권의 책들은 이 하나의 큰 이야기가 갖는 통일성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권이 가진 다양성은 어떤 책도 진리를 독점하거나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우선권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성경은 66권의 다양한 저자들이 자신들만의 특유한 시각, 색상과 색조, 전체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책임지고 있는 고유한 역할을 발표하는 심포지움의 무대와 같습니다. 만일 각권이 갖는 독특한 신학적 지평, 각각의 사건과 개별 본문의 고유한 의미를 간과하거나 희생시킨다면, 하나님이 역사의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 특정한 책과 본문을 통해 계시하고자 하셨던 신적 목소리도 간과되거나 묵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독자는 반드시 하나의 이야기라는 큰 그림(Big picture)을 배경으로 각권의 고유한 관점들이 전체 화폭에서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 66권의 책들이 점진적으로 계시되는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갖는 독특한 역할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정독(精讀)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 책은 ‘하나의 이야기’라는 통일성의 울타리 안에서 각권의 고유한 다양성을 자세히 살피는 이 ‘정독’의 불가피성에 최우선적 목표를 두고 출발한 책입니다.
전체 성경을 하나의 이야기로 읽으면서 다양성과의 균형을 맞추려면, 신구약 전체의 다양한 주요 주제들을 하나로 묶는 중심 줄기부터 찾아내야 합니다. 전체 이야기를 떠받치고 있는 기본 구성과 중심 주제가 보여야 통일성 속에서도 다양성을, 다양성 속에서도 통일성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에 완벽한 왕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근접한 지점에 접근할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기독론적으로, 그리고 선교적으로 해석하십니다눅 24:44-47. 그리스도는 신구약 성경을 하나로 묶는 연결 고리이고 핵심 주제입니다. 구약은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언하고, 신약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구약 예언의 성취로 이해합니다. 성경의 거의 모든 주제는 그리스도에게 모아지고, 하나님의 구속사는 그리스도를 통해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단계에 이릅니다.
‘모든 열방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주제는 인류가 창조된 이후,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가라…복이 되라’창 12:1-3고 명하신 이후 한 번도 멈춘 적 없이 흘러가는 성경의 중심 줄기이고 최종 목적지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계시의 절정이라면, 선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세상에 전달하는 것입니다. 선교적 관점으로 본다면 성경 전체 이야기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세상에 드러내는 ‘인류의 선교’(창 1-11장), ‘이스라엘의 선교’(창 12장-말라기), ‘예수님의 선교’(사복음서), ‘교회의 선교’(사도행전과 서신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로 묶는 중심 줄기는 계시된 뜻의 절정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는(기독론이 선교적으로 확장되는) 선교 이야기다.’
실재의 100%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지도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성경이라는 광대한 본문의 모든 세부적인 실재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해석학은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성경 신학에 근거한 해석의 틀은 66권의 전체 이야기를 보는 관점, 각권의 다양성 속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 줄기를 관찰하는 방식, 신적 저자의 목적을 이해하는 지침을 제공해 줍니다. 이 책은 신구약 성경이 다양한 방식으로 들려주고 있는 두 합창의 중심 선율을 ‘그리스도의 이야기’, 그리고 ‘그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이야기’로 보시는 예수님 자신의 성경 해석 관점을 의존합니다. 그 전제하에서 전체 이야기의 중심 줄기를 ‘기독론적’ 관점과 ‘선교적’ 관점으로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이 책의 부제를 「예수님의 성경 해석 관점으로 읽는 정독 시리즈」로 정한 이유입니다.
이 책이 지향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목표는 본문이 가진 본래의 의미를 신적 저자의 본래 의도를 훼손하지 않고 복원해내려는 씨름입니다. 성경을 펼쳐서 읽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모두 불가피하게 독자인 동시에 해석자입니다. 모든 독자는 자신의 관심사와 정황, 갈망과 욕구를 가지고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흔히 독자의 ‘이해 지평’이라 불리는 해석의 틀을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성경을 읽고, 자신의 필요와 갈망대로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우리는 이런 독자 중심의 성경 읽기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오독과 왜곡, 성경의 남용과 훼손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저자가 아니라 독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성경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스림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이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가 성경에서 들어야 하는 최우선적 목소리는 인간의 갈망과 욕구가 투사된 독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본문을 주신 신적 저자의 목소리여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 본문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수많은 자기 중심의 보따리를 내려놓을 수 없다면, 본문의 본래의 의미는 독자의 이해 지평에 제한받을 수밖에 없고, 신적 저자의 본래 의도는 훼손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외에’ 혹은 성경 ‘위에’ 성경을 해석하는 다른 기준은 없습니다. 최선의 길은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바른 전제를 가지고 본문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문맥은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최선의 원칙을 제공합니다. 문맥을 무시한 해석은 신학이 없는 해석이 되기 쉽습니다. 신학이 없는 해석은 성경을 영감 된 하나의 이야기로, 본래의 의도대로 읽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그 목적에 도달하기에 역부족이고 함량 미달이라 할지라도, 이 책은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신학적 전제 아래 문맥을 중시하는 해석을 지향하려 했습니다. 역사적·문학적·신학적 문맥과 함께 구약과 신약의 문맥, 다음 책,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문맥들 속에서 신적 저자가 의도하신 본문의 본래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것 외에 독자의 자의적 해석으로부터 오는 성경의 수많은 오독과 왜곡과 남용을 피할 수 있는 다른 특별한 방책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성경을 읽다』라는 제목은 그런 어설픈 고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간’(人間)이라는 말 자체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동체적 본질을 담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이 출판되기까지의 모든 과정도 공동체적이었습니다. 홀로 외딴 섬에 격리된 듯 외롭고 고독한 시간인 것 같았지만, 긴 여정의 굴곡진 길목마다 신묘막측하게 보내주신 위로와 합력의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매와 무지함에 대한 자괴감, 거듭된 교정에도 여전히 허점투성이인 원고에 대한 절망감, 길어지는 은둔의 시간으로부터 오는 관계적 소외감, 가상의 시나리오 안에서 펼쳐지는 독자의 싸늘한 반응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마음이 붕괴될 때마다, 눈물이 쏟아질 만큼 시의적절하게 위로와 격려의 보따리를 안고 다가와 준 고마운 사람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집필과 출판의 모든 과정을 쉼 없는 기도와 눈물겨운 격려로 함께 해준 아름다운 동역자이며 평생의 동지인 카리타스 선교회의 골육 같은 동기들에게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 오랜 시간 출판을 기다리며 기도해주신 산지교회 성도님들, 특심한 관심과 애정으로 전 과정을 지켜봐 주시고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신 이기복 교수님, 횃불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대학교의 이정숙 전 총장님과 14학번 동기들, 의미 있는 지지 기반이 되어주신 송인규 교수님, 김진혁 교수님, 김아영 교수님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가장 깊은 골짜기의 심연에서 생명줄 같은 버팀목이 되어준 고마운 아우 김양규, 마지막 지점까지 각처에서 여러 모양으로 응원해주고 서포트해 준 사랑하는 제자들, 집필 과정 내내 뜨거운 눈물의 기도와 애정 어린 피드백으로 지친 마음을 끌어올려 주신 J 집사님 부부에게는 다 갚을 수 없는 큰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부족한 원고를 과분하게 평가해주시고 큰 비전으로 격려해주신 킹덤북스(Kingdom Books) 대표 윤상문 목사님을 만난 것도 섭리하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신학대학원 시절부터 집필 과정까지의 7년 동안, 한결 같이 기쁜 마음으로 컴퓨터에 관한 모든 문제를 먼 미국에서 즉각 즉각 팀 뷰어로 해결해준 보배로운 사위 윤범이 없었다면, 이 책은 먼 길을 끝까지 완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도 오래 앉아 있어서 움푹 패이고 너덜너덜해진 책상의자를 평생 간직하겠다고 절대 못 버리게 할 만큼 글쓰고 공부하는 자기 엄마를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해준 살 같은 딸 유지, 출간을 앞두고 때 마침 귀국해서 특유의 감각으로 글과 표지 디자인을 꼼꼼하게 피드백해준 아들 세준과 며느리 현지, 허구한 날 공부방에만 틀어 박혀 있는 아내를 한 번의 불평 없이 전심으로 외조해 준 남편에게 ‘그대들이 있음으로 나는 충분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옆에 계셨다면 가장 기뻐하셨을 하늘에 계신 육신의 아버지께 이 책을 전해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우주의 미아였던 한 외로운 피조물에게 다가와주시고, 성경을 열어서 보여주시고, 위대한 구속사의 여정에 초대해 주시고, 부르심의 소명에 응답할 수 있도록 섭리해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이 책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기를 힘쓰는’딤후 2:15 누군가에게 한 줄기 희미한 빛이라도 될 수 있기를, ‘한 책’의 사람으로 불리기를 소원하는 누군가에게 영적 갈망을 터트리는 미약한 촉매라도 될 수 있기를, 한없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2021년 1월에, 남상화
---「들어가는 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