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은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달리면서 경적을 울려대는 끝없는 차의 행렬을 피해갔다.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 온몸으로 느껴지는 감각을 사랑한다. 그럴 때면 온몸이 깨어나서 살아있는 기분이다. 그녀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가득 찬 가게들과 좌판들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보도를 지나쳤다. 저가 전자제품들, 장난감들, 옷들, 유럽의 화려한 비누와 케이크들, 입에 침이 고이게 하는 은박지에 싼 군고구마, 고소한 냄새가 나는 튀긴 두부. 덥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느라 힘을 쓴 몸에 셔츠가 찰싹 달라붙었고, 가끔 이마를 흐르는 땀이 눈에 들어가지 않게 닦아야 했다.
그렇게 커피숍에 도착했다. 징은 가녀린 몸매에 무늬 없는 흰 원피스와 얇은 재킷(에어컨 때문에)을 우아하게 입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가까이 가서 맡으면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희미한 꽃향기가 풍겼다.그녀는 항상 그렇듯 눈부시게 환한 미소로 유안을 맞았다.
마치 오늘 밤이 세상의 종말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 pp.17~18, 「일곱 번째 달 일곱 번째 밤」
“이봐요, 새해가 도착했나요?”
모퉁이를 돌아서자 작은 인간이 하나 나타났다. 인간 소년이다! 새해는 냉큼 소년에게 가서 재빨리 그를 바닥으로 때려눕히고, 커다란 앞발 두 개로 그의 어깨를 누른 채, 목에 대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잠깐만 기다려!” 소년이 소리쳤다.
새해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오므렸던 발가락들을 폈다. 이제 그의 입에 고인 침이 소년의 얼굴에 떨어질락 말락 했다. 새해는 배가 고팠다. 음식이 필요했다.
“내가 널 여기로 불렀는데 날 잡아먹는다면 배은망덕이잖아.” 소년이 말했다.
“나를 ‘불렀다니’ 무슨 뜻이지?” 새해는 소년을 누르고 있는 발의 힘을 조금 뺐다.
“네가 몇 년 동안이나 사라져 버려서 사람들이 널 잊어버렸어. 내가 너에 대한 글을 읽고 널 다시 부르려고 시도한 거야. 나 아니었으면 넌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야.”
새해는 소년을 놔줬다. “그러니까 넌 내가 무섭지 않군.”
“당연히 안 무섭지.”
새해는 한숨을 쉬었다. 여기는 먹을 게 없군.
--- pp.55~56, 「새해 이야기」
은하항구 모슬포 터미널은 수많은 별자리를 잇는 광자로의 중심지 중 하나다. 나는 거대한 빛줄기가 고요히 흐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묘한 흥분을 느꼈다. 수많은 뱀이 천 년에 걸쳐 똬리를 트는 것 같기도, 천 년에 걸쳐 자라나는 나무의 뿌리를 고속으로 돌려보는 것 같기도 한 풍경이다. 은하항구의 광자로는 오늘도 무수한 정보들을 머나먼 우주 곳곳으로 실어 나르고 있다.
영감은 내가 창밖을 바라보며 감탄을 하든 말든 배를 움직여서 항구에 정박시킨다. 이십 년 차 베테랑 사냥꾼쯤 되면 은하항구에서의 사냥이야 대수롭지 않은 일인 모양이다.
“쇠대가리. 도착하면 음료 하나만 뽑아 와라.”
영감의 명령에 철판으로 덧댄 이마를 한 손으로 쓸어 넘긴 뒤 조용히 주먹을 들어올린다. 영감은 기도 차지 않는다는 표정이 되어서 나를 노려본다. 하지만 그의 범 잡아먹는 눈빛도 나를 굴복시키지는 못한다. 결국 영감도 나에게 주먹을 들어보였으니까.
“가위.”
“바위.”
“보.”
--- pp.83~84, 「아흔아홉의 야수가 죽으면」
그들이 떠났다. 우리를 물속에 버려두고. 그들은 우리를 커다란 비눗방울 같은 막에 넣고 바다에 던졌다. 우리는 투명한 막 속에서 몸부림치다 정신을 잃었다. 우리가 물 위로 떠오른 것은 그들이 대기권을 완전히 벗어난 후였다.
두두두두, 기관총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헬기의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우리를 둘러싼 막은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 나와 함께 납치된 네 명의 아이들은 알몸으로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수치심을 느낄 틈은 없었다. 모터보트가 다가오자 진한 휘발유 냄새에 속이 뒤집혔다. 잠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보트에서 뛰어내려 우리에게 헤엄쳐 왔다.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 pp.133~134, 「거인 소녀」
죽은 달의 바다. 탐라성을 둘러싸고 있는 바위 조각의 띠다. 아니 띠라기보다는 껍질에 가깝다. 적도와 극지를 가리지 않고 제각각의 궤도로 탐라성을 돌던 수많은 위성은 이제 모두 충돌해 부서지고 크고 작은 파편들만 남아 탐라성 주변의 우주를 맴돈다.
몽라는 이층 건물 크기만 한 위성 조각의 울퉁불퉁한 틈에 몸을 고정하고는 별이 한가득 박혀 있는 우주가 흘러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검은 그림자에 뒤덮여 있던 탐라성의 한쪽 구석에서 조금씩 빛이 배어나오며 커다란 호로 번져나갔다. 잠시 후 탐라성의 태양인 코렐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우주에서 보는 일출이었다.
탐라성은 코렐 항성계의 가장 바깥쪽 궤도를 도는 작은 행성이다. 차갑게 얼어붙었어야 할 행성의 표면에는 푸른 바다가 뒤덮여 있다. 비정상적으로 활발한 지각 활동으로 인해 뿜어져 나오는 지열 덕분이다. 사람들은 작은 행성 곳곳에 흩어진 화산 근처에 모여 산다. 몽라 역시 마찬가지다.
--- pp.179~180, 「서복이 지나간 우주에서」
보름달이 비치는 구쥬 해변. 파도가 부서져 스러지는 곳으로 아만은 후박나무를 도려내 만든 배를 끌고 나왔다.
팔십 척이나 되는 거대한 선단으로 공격해온 사쓰국サツ?에 대항하려면 수면 위를 날듯이 미끄러지는 목조선이 있어야 한다는 촌장의 판단 아래, 해변 안쪽 구석에 남겨져 있던 통나무배다.
파도에 젖은 모래 위로 엉덩이를 깔고 앉은 아만은 앞으로 갈 저 건너 섬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바람이 뚝 멈춘 한밤중의 해협은 스륵스륵 몸을 흔들며 시커먼 건너편 섬의 형상을 비추고 있다. 눈을 뜨고 가만히 바라보자 그림자로밖에 안 보이던 섬의 음영이 선명하게 드러났고, 목적지인 니바마新浜가 달빛으로 빛나는 것도 보이기 시작했다.
“늦지는 않으려나.”
아만은 아버지 우쥬에게서 배운 대로 오른쪽 눈을 감고 달을 올려다보며 그 위치를 확인했다. 한쪽이라도 눈을 어둠에 익숙하게 남겨 두면 위험으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다.
--- pp.251~252, 「바다를 흐르는 강의 끝」
응용포논빔학회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응용포논빔학회는 혼자서만 참석해야 하는 행사다. 그게 행사 규정으로 정해져 있었다.
학회 날이 되면 회사에 출근하는 대신에 상쾌하게 기분 전환하듯 공항으로 떠난다. 여유로운 느낌으로 혼자 제주도의 행사장으로 간다. “팀장님, 점심은 어디에서 먹을까요?”라는 식으로 시중들어야 할 사람도 없고, 쉬는 시간에 “소장님, 피곤하니까 있다가 점심은 피조개 어떠십니까?”라는 식으로 재미없는 대화를 일부러 나누어 할 사람도 없다. 행사에 참여하는 학자들의 얼굴도 밝고, 그들이 발표하는 내용도 유난히 알차고 풍성해 보인다. 웃기려고 집어넣은 첫 슬라이드 말고도 나머지 내용들도 기억에 잘 남는다.
--- p.280, 「내가 잘못했나」
어르신들은 먼저 적당한 곳을 찾았고, 다음으로 물 밑의 지각을 주무르고 용류鎔流를 모은 후, 물속에서 작은 화산들이 터지게 만드셨다. 머지않아 그곳에는 화산섬이 생겨났다. 작은 해저 화산들이 쏟아내는 분출물로 땅이 생겼고, 어르신들께서는 이들 화산의 용류를 하나로 엮어 중심이 되는 산을 만들었다. 없던 땅이 생기자 근처의 물살과 비바람이 거세졌다. 유체들이 거칠어지자 짐승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어르신들은 여기에 몇 가지 수를 더하여, 섬 근처에서 세 개의 용류와 네 개의 해류, 일곱 개의 기류를 볼 수 있게 하셨다. 특히 섬이 올라오자 와류가 생겼는데 이 와류는 비슷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특했다. 우리 어르신들의 지혜를 보여주는 설계라 할 수 있다.
--- pp.318~319, 「불모의 고향」
이게 다 그 지수 때문이다. 뇌의 칩을 통해 세상의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능력 지수인 소셜집단지능지수. 누나가 그 지수의 상위 0.2퍼센트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부모님 없이 서로를 의지하며 자라온 우리 오누이 삶에도 드디어 볕이 드나 싶었다.
하지만 높은 지수의 사람들이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 시작한 것은 얼마 안 가서였다. 소셜집단지능지수가 높은 이들은 현재 과학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정보들도 받기 시작했다. 이 메커니즘을 해석할 수 있는 과학자는 없었다. 세계 곳곳의 정부들은 대응책을 내놓았다. 뇌의 칩을 모두 리콜해버린 것이다. 대체된 칩은 예전처럼 모든 정보를 다운받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모두 만족했다. 성능이 좋지 않은 것에 사람들은 안심했다. 알 필요도 없는 정보를 걸러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 pp.370~371, 「소셜무당지수」
“인간의 씨앗 하나에만 코돈 조각 수억 개가 정성스럽게 쌓아 올려져 있으니, 예순네 가지 성정의 많고 적음이 저마다 차이가 있어 아이들은 모두 각자의 개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야.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애기 씨가 이 주삿바늘 속에 들어 있네. 이제 그대의 뱃속에 착상을 마치면 이윽고 한 생명의잉태가 시작될 것이네.”
마고는 천천히 몸의 힘을 풀고 치마를 들어 올렸다. 산은 마고의 다리를 열고 주삿바늘을 집어넣었다. 출산을 평생의 업으로 살아온 두 사람에게 이는 무척 익숙한 일이었다.
--- p.406, 「홍진국대별상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