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우리는 이 대립으로부터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문학의 양적인 실체성은 왜 이러한 애매한 방식으로, 다시 말해 취소되지 않는 방식으로 취소되어야만 했을까? 그리고 문학에 대한 양적인 접근과 대립하는 문학의 무효화가 “자신의 제한 없음”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제한 없음”은 이 무효화와, 그리고 동시에 거부된 것으로서 그것의 잔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 p.25, 강보원, 「아주 조금 있는 문학」 중에서
소설가 화자는 그간 주어졌던 기성의 담론과 언어를 갱신하는 퀴어 페미니즘적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이제부터 자신의 새로운 재현 언어가 이후의 세대에게 다른 툴이 될 수 있다라는 자기 수행적 역사철학이다. 이것은 재생산 미래주의4를 비롯하여 퀴어의 시간을 자기 폐쇄적인 단절이나 죽음 충동적 향유로 한정하는 기성의 독법에 대한 적극적인 대타 의식이기도 하다. --- p.71, 김건형, 「한국 퀴어 소설에 나타난 자기 반영적 서술 전략」 중에서
내가 나에 의해 대상화되는 현장을 보여주고 있는 이 시는 자기 자신과 타자로 분열되어 있는 주체의 상태를 부분의 감각을 통해 재현한다고도 볼 수 있다. 여전히 중요한 것은 떨어지고 있는 ‘나’와 목격하는 ‘나’ 사이에 통합을 전제한 의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는 유계영의 1인칭이 완전하고 독립적인 ‘부분’을 생산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 p.97, 박혜진, 「부스러기의 역습 : 유계영,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중에서
연극적이고 다층적인 시적 주체들이 단단하고 진실된 실체가있는 것으로 여겨지던 현실의 텅 빈 허위를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면, 현실세계에서 침입한 이 발화자들은 이와는 정확히 반대로 실제 유효한 억압으로 작동하고 있음에도 무해한 가상의 세계로 간주되던 시의 진실과 유효성을 폭로하려 하는 것이 아닐까. “문장에 머물렀을 때 가장 아름다웠”던 이야기들은 이제 그 무용한 아름다움의 안전 공간조차 의심받게 되었다. --- p.116, 조대한, 「21.2세기 시인들의 세계」 중에서
2000년대 진정성 주체의 내면을 구성했던 마이너리티-남성이라는 자의식과 2020년대의 남성-마이너리티는 분명 다른 시대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쉬이 동일시한다거나, 오늘날의 남성-마이너리티 자의식이 내보이는 폭력적 보수성이 진정성 주체의 기획에 내재되어 있었다고 비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마이너리티-남성의 진정성을 통해 닿을 수 있는 윤리는 사회적 책임성을 사유하는 데 무력하다는 사실이다. --- p.169, 김요섭, 「아버지는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나이다」 중에서
문학의 젠더를 물을 수 있을까? 작가의 성별, 인물의 성 정체성, 독자의 분포 같은 것들은 얼마나 유의미한 정보일까? 남성적 서사, 여성적 감수성, 이야기의 힘, 섬세한 내면 같은 수식이 여전히 유효할까?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구분되지 않는 다양한 젠더 정체성의 시대에 성별을 따지는 일이 필요할까? 여성이 주인공이고 여성의 이야기가 다루어지지만 남성 작가가 썼다면 그것은 여성 서사일 수 없을까? --- p.172, 노태훈, 「7 : 3」 중에서
어떤 세계에서도, 심지어 난민화된 세계에서조차도 난민화의 힘은 동등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난민이다’ 따위의 말이 실제로는 어떠한 정치적 함의도 지니지 못하는 것처럼, 모두가 난민화된 세계에서도 중요한 것은 그 세계의 난민화를 인식하고 사유할 줄 아는 자가 누구냐는 것이다. --- p.205~206, 이소, 「죄의식의 남성성, 해원解?의 여성성 : 임철우 소설을 중심으로」 중에서
2000년대 이후로 문단에서 각광받았던 남성 서사에 위처럼 일종의 백미러를 비춰본다면 어떨까. 주로 민족적·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와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 스타일의 결합으로 재현되었던 남성 서사는 크고 넓은 스케일, 빠르고 선형적인 전개, 근대적 미학과 대중적 오락성의 동시적인 성취 등과 같은 요소를 통해 범주화될 수 있을 것이다. ‘K-문학’이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러한 서사는 국가, 민족, 가족 등 단일한 원천으로부터 발원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통합되는 ‘본질주의적 문화’에 대한 신화가 붕괴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다. --- p.217~218, 이은지, 「남성 서사 속 하위주체 남성들 : 바나나맨과 까막눈과 투명인간」 중에서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해 소비하는 이들은 자신에 대한 고찰이 습관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현재 시의 구매자들에게 가장 쉬운 사유는 ‘나’에 입각한 사유이며, ‘나’에 입각한 읽기일 것이다. 더불어 자기표현 욕구가 충만한 이들에게 자신에 빗대어 읽고, 자아를 확장하는 행위는 가장 확실한 동기가 된다. 따라서 현재 시의 구매자들에게 자신을 비추고 자신에 빗대는, 가장 사적인 읽기는 가장 많이 하고 가장 익숙한 사유 방식이자, 동기가 확실한 방식이다. 이 사적인 읽기를 택한 이들이 시를 지속적으로 구매하고, 이로써 시인의 작업을 지지하는 것이다. --- p.266~267, 김정빈, 「시의 사적인 독법」 중에서
시는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시인의 주체적 정서를 드러낸다는, 전통적인 정의에 따르면 시적 이미지에서 원본이 사라진다는 것은 시 속에 나타난 ‘주체’나 시적 대상인 ‘객체’에 대한 정의가 모두 변화함을 의미한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김준오, 『시론』)에 균열이 생긴 이상 이는 불가피한 일이다.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생긴다. --- p.293, 김지윤, 「유동하는 시의 좌표와 멀티 페르소나」 중에서
이들은 스마트폰이나 SNS를 통해 거의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느슨한 관계를 유지한다. 즉, 디지털 환경은 혼자이되, 혼자이지 않은 상태를 가능하게 한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에 해당하는 Z세대는 타인과의 관계에 집중하기보다는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을 즐기며, 자기 자신의 행복과 안정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혼자 살기란 주체적이며,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의미이다. --- p.312~313, 박윤영, 「어떤 독서법-감정적 읽기 :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중에서
그 자체로 고정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맺는 관계에 의해 언제든 변화 가능하며 그것을 둘러싼 말이나 텍스트에 따라 이동 가능한 ‘의무에서 자유로운 구역’으로서의 ‘공동의 정체성’을 창조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시는 시인에게 고착된 것도 아니며 특정한 상징 자본의 힘이 작동하는 공간도 아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관계 맺음을 통해 정체성을 부여하고 그에 따라 자유로운 의미를 향유할 수 있는 경험 그 자체가 된다.
--- p.335, 이병국, 「시와 시인 그리고 플랫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