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학생! 학생! 얼른 정신 차려.”
사장님이 내 어깨를 흔들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내가 짜장면 그릇에 코를 박고 기절해 있었단 걸. 필름이 지지직거리던 만취 상태에서 나는 마치 김유신의 말처럼 중국집을 찾아갔던 것이다. 짜장면 곱빼기를 먹다가 취해서 고개를 박고 잠이 들었다. 얼굴에 짜장이 얼룩졌을 것 같아 손으로 더듬어보았는데,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취중에 짜장면을 거의 다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그릇을 내려다보니, 쇼트닝이 허옇게 굳은 짜장 소스가 보였다. 접시에 코 박고도 죽는다는데, 나는 어떻게 살아난 것일까. 짜장이 아니라 우동이나 짬뽕이면 죽었을까.
--- p.16, 「나는 왜 짜장면에 매혹되는가」 중에서
운명의 승부 큐를 앞둔 순간, 시간을 너무 지체하면 야유를 받는다. 그러나 짜장면을 흡입하고 있으면 봐준다. 불면 못 먹게 되니까. 불어버린 짜장면은 치욕이니까. 다들 짜장면에 존경심을 갖고 있던 시대였다. 미처 삼키지 못한 면발 한 줄기를 입 밖으로 삐죽 내민 채, 서둘러 큐대를 겨눈다. 픽, 하고 헛맞으면서 삑사리(?)가 나고 놈은 마지막 엎어 쓰기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어느 창문이 잘 열리더라? 바깥에 ※ 표시가 있는 창이던가, 파란 당구공 붙은 창이던가?
--- p.25-26, 「나는 왜 짜장면에 매혹되는가」 중에서
장을 볶는 것은 대단한 요리다. 장이란 이미 감칠맛이 넘친다. 장이 익어가는 과정도 마이야르 반응의 일종이라고 한다. 고기 등을 불에 지질 때 생겨나는 맛 물질의 증폭 효과가 이미 장을 담근 시기에도 조금이나마 일어난다는 것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 맛있는 장을 기름에 볶는다. 왕년에는 그것도 돼지기름에 볶았다. 놀라운 향이 퍼진다. 여기에 감칠맛 강한 양파를 볶고, 또 설탕을 쳐서 캐러멜라이즈 효과를 내며, 미원도 넣는다. 무적의 간짜장이다.
--- p.56-57, 「부원반점이 문을 닫았다」 중에서
누가 그러지 않았나. 헬스해서 만든 근육은 금세 꺼지지만, 노동이 만들어준 잔근육은 잘 없어지지 않는다고. 인간의 노동이 탄생시킨 존경스러운 근육이라고. 몸 만들고 싶은 사람들은 매일 밀가루 한 포씩 반죽하면 된다. 다 되면, 나를 불러주시라. 짜장은 내가 만들어드릴게.
--- p.62, 「부원반점이 문을 닫았다」 중에서
“열심히 요리를 배워 중국 제일의 주사가 되겠습니다!”
내륙의 어느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 틀림없을, 볼이 빨갛게 튼 소년이 화면에 대고 말했다. 아직도 덜 자란 팔뚝으로 무거운 웍을 들고, 용을 쓰며 키질을 하는 장면이 클로즈업했다가 줌아웃되면서 멀리 빠졌다. 운동장 안에 그렇게 막 요리학교에 입학한 1학년들이, 겨우 열서너 살쯤으로 보이는 소년들이 가득한 장면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가 중국에 여행 가서 먹는 요리를 저들이 만들겠지, 그리고 연애하고 아이도 낳고 시골의 부모님께 돈도 부쳐드리겠지. 소년의 팔뚝은 자라서 우람해지고, 늙어가겠지. 웍으로 단련된 팔뚝에 기름이 튀어 온갖 흉터를 전쟁용사처럼 새긴 채로 말이지.
--- p.110, 「중국집 주방장이 날리던 시절」 중에서
집에서 반죽을 밀대로 펴서 칼국수처럼 썰었다. 면을 익혀 짜장 소스를 붓고 비빈다. 아아, 기막히다. 짜장이 면 표면에 착 붙는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같다. 어이, 잘 지냈어, 이들은 깊게 우정의 포옹을 한다. 찰싹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씹으면 짜장에서 구수한 중국 된장 향이 올라오고, 이내 밀가루의 쫀쫀한 식감이 공격해 들어온다. 손으로 반죽하는 게 할 때는 힘들어도 먹을 때는 좋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한 덕후의 짜장면 만들기다. 가게에서 한다면 수타를 제대로 배우거나, 기계를 써야 하겠지.
--- p.137, 「없으면 만들어 먹는다」 중에서
짜장면의 역사를 설명할 때 꼭 등장하는 것이 인천의 노점 짜장면이다. 부두에서 노동하던 중국인 노동자들이 노점에서 사 먹던 음식에서 짜장면이 탄생했다는 설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추적이 불가능하다. 그저 오래전 가족도 없이 혼자 돈 벌러 와서 이국땅에서 노동하던 사람들의 기약 없던 마음을 생각할 뿐이다. 그것이 짜장면 맛에 녹아 있다고 생각하니 울컥, 무엇이 치민다. 애쓰는 모든 이들에게 국적이 무슨 소용이랴.
--- p.141-142, 「없으면 만들어 먹는다」 중에서
나는 프로답게 하늘하늘, 아삭아삭 똑같은 크기로 잘 썬 오이를 얹은 짜장면을 먹으면 아주 기분이 좋아진다. 무슨 요리든 잘하는 집이라고 믿게 된다. 그까짓 오이 좀 안 올리면 어때, 일손도 없는데 대충 썰어서 올리면 어때. 그런 마음 대신 정성껏 가늘게 채썬 오이를 짜장면 위에 올리는 마음이라면, 믿을 만하지 않은가.
--- p.155, 「전국의 짜장면집 순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