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의 인생에 다시 봄이 오면 에밀 타케 신부 도록을 만들고 싶어 했고 에밀 타케의 한라산을 다시 보고 싶어 했다. 자신이 낼 신간에 수술 이후의 삶을 작업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것을 다시 하려고 한 약속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것도 의미 있는 영혼의 기록이다.
--- 「머리말, 정홍규 신부」 중에서
봄꽃구경 함께 가자고 하고선…
만물이 생동하는 봄꽃들의 향연이 펼쳐진 계절에 산벚꽃 흐드러지게 핀 날 부모님 곁에 영원한 안식처를 잡았지요.
가끔 연락두절로 주위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워도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우리 오빠!
세속의 잡다한 번뇌 없이 새롭게 자리 잡은 그곳에서 부모님 손잡고 하늘나라 구경 마음껏 하세요.
--- 「머리말, 여동생 덕이 에반젤리나」 중에서
나는 고교시절 이후 한 번도 읽지 않고 책꽂이에 모셔놓았던 세계명작 오십 권과 함께 또다시 도시를 탈출했다. 늦은 오후 도착한 산중턱 마을은 인기척이 없었다. 10여 채의 낡은 시골집들은 대부분 텅 비어있었고, 누런 똥개 두 마리만 좁은 골목길을 어슬렁거렸다. 유배지 같은 산골은 해가 떠 있어도 을씨년스러웠다. 나는 재빨리 집으로 들어가 녹슨 철 대문을 잠갔다.
방에는 작은 책상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TV는 없었고, 휴대폰은 통화불능이었으며, 인터넷도 연결되지 않았다. 완벽한 고립이었다. 소설책 읽기와 산책, 책상에 앉아 음식 삼키기, 끝없는 잠의 나락那落, 나의 일상은 그것뿐이었다. 가끔 얼굴에 저승꽃이 만발한 이웃집 할머니가 대문을 두드렸지만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 p.36~37 「1부, 사랑-길찾기」중에서
몇 달간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은 떠났고 나는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함께 축제를 진행했던 H 감독이나 K 상임이사, 몇몇 공무원들에겐 독선과 아집, 자만심 덩어리로 비쳤을 것이다. 타협과 조율이 없었으니까. 후회와 아쉬움은 있었지만 자괴감은 들지 않았다.
김덕수의 사물놀이, 임동창의 국악 피아노 연주는 예술적 아집과 자만심 없이는 결코 탄생할 수 없는 음악 작품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집념이 일상의 비지니스로 장르가 바뀌면 독선으로 전락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씁쓸한 회한도 남았다. 인간의 조직을 이끌고 생존하는 지혜가 나에겐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 p.81 「1부, 낯선 길」 중에서
“생음악이 활어라면, LP는 싱싱한 생선회, CD는 통조림, MP3는 육즙이 완전히 제거된 건포로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금방 조리한 신선한 음식을 먹을지, 방부제가 듬뿍 밴 패스트푸드를 섭취할지는 순전히 소비자의 선택이겠지요.”
두 남자가 부러웠다. 하지만 나는 10년 전부터 색다른 아날로그 소리를 찾아 설과 추석 연휴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어느 소읍에 위치한 수도원과 어느 산골 선방을 번갈아 찾는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심이나 불교적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니다. 수도원 성당에서 메아리치는 파이프오르간 소리, 수도사들의 청아한 기도 소리가 듣고 싶어서다. 또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북소리와 목탁 소리, 염불 소리가 그립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자연스럽고 멋있는 아날로그 사운드가 또 어디 있으랴!
--- p.101~102 「2부, 소리를 찾는 남자들」 중에서
내가 살아있는 오도 아빠스 님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파티마병원 중환자실이었다. 면회 시간은 하루 20분, 1회뿐이라는 병원 관계자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침상 위에 누운 노老성직자의 모습은 참담했다. 양쪽 콧구멍엔 투명관이 꽂혔고, 팔목을 찌른 호스엔 맑은 액체가 천천히 흘렀다. 오른편 머리맡에는 LED판이 장착된 의료기구가 냉혹하게 놓여 있었다.
그는 한때 대수도원장이었지만, 죽음을 앞두고 수십 년간 동고동락했던 수도자들로부터 지금은 완전히 격리된 것이다. 살아 숨 쉬는데도 이미 외톨이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나는 몸서리쳤다. 눈을 지그시 감은 수도승은 입을 벌린 채 숨을 할딱거렸다. 죽어가는 그에게 몇 마디 말이 절실한데도 도무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통통하게 부푼 그의 손등에 내 손바닥을 조심스레 얹어보았다. 희미한 온기가 전해졌다. 순간 푸른 눈빛이 나를 응시하며 분홍빛 혀가 조금 떨렸지만 음성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왜 팔십 평생 어질게 살았던 이 수도승이란 말인가? 왜 하필 지금인가? 왜 이런 방식인가?”
중환자실을 나오며 나는 이 질문을 수없이 던졌다. 빌어먹을 이 고독한 사막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한다는 어두운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러다가 회복될 수도 있어요….” 물기를 머금은 오도 아빠스의 푸른 눈동자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 환자들을 체크하던 무표정한 간호사의 희망 메시지를 떠올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침묵이 무거운 외투처럼 이 수도승의 어깨를 내리누르고, 나는 오랫동안 그 침묵에서 헤어나질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을 떨칠 수 없었다.
--- p.129~130 「3부, 오도 아빠스와 작별」 중에서
그는 틈만 나면 산골의 토굴로 들어갔고, 때로는 왜관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며칠씩 지내다 오곤 했다. 10년 전 초여름 나와 친구 등 세 명이 종건 씨의 주선으로 수도원에서 하룻밤 이틀 낮을 보낸 적이 있다. 그때 하루에도 여러 차례 열리는 미사를 성당 2층 신자석에서 바라보면서, 또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파이프오르간의 그레고리안 성가를 들으며 경건함과 표현하기 어려운 벅찬 감정을 느꼈었다.
특히 미사가 끝나고 수사들이 모두 줄지어 나간 뒤에도 한 수사가 자리에 남아 머리를 여러 차례 앞줄의 나무 의자에 부딪던 모습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다. 젊은 날의 수사 시절 전종건의 모습이 아마도 저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전종건은 떠났지만 지금도 전화를 걸면 그가 천연스럽게 “전종건입니다.” 하고 대답할 것만 같다. 아직 그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것이다. 가끔 그가 무척이나 그립다!
--- p.178 「4부, '지금도 전화하면 ‘전종건입니다' 하고 받을 것만 같다-예술가보다 더 예술을 사랑했던 전종건을 그리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