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내가 살던 버지니아였다면 상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가던 길을 멈추었을 것이고,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단 몇 분 만에 기자들과 카메라가 도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 맨해튼에서는 행인이 차에 치이는 정도는 너무 흔한 사고여서 그저 불편한 돌발 상황일 뿐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었다. 누군가는 길이 막혀서 불편하고, 누군가는 옷을 버려서 난감할 뿐, 너무 자주 있는 일이어서 뉴스거리도 못 되었다.
이곳 사람들의 무관심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바로 그 점에 매료되어 나는 10년 전 이 도시로 왔다. 나 같은 사람은 인구가 밀집된 도시가 어울린다. 이 정도 규모의 도시는 내가 어떤 삶을 살든 상관하지 않는다. 나보다 더 기구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곳에서 나는 투명 인간이다. 미미한 존재다. 나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갖기에 맨해튼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래서 나는 이 도시가 좋다. --- p.8~9
무서워했다는 말은 좀 심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어머니는 분명 어린 내가 정상적인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학교에 다니는 것 외에는 되도록 내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했다. 종종 몽유병 증세를 보이던 내가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몰라 늘 불안해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그러한 피해망상적 태도는 내 안에 깊이 각인되어서 어른이 될 때까지 따라다녔고, 결국 나는 혼자 지내는 데 아주 익숙한 사람이 되었다. 아주 소수의 친구 관계를 유지하며,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주가 지나서야 처음으로 집을 나서게 된 것이다.
몇 주 만에 처음 하는 외출은 내가 가보고 싶었던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센트럴파크나 서점 같은 곳.
이렇게 출판사 로비에서 신분증 검사를 받고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 p.19~20
자서전을 쓰는데 가장 꺼려지는 점은 문장 하나를 쓸 때마다 각색하고 싶은 유혹이 따라붙는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영혼과 작품 사이에 켜켜이 들어서 있는 보호막을 철저하게 걷어낼 생각이 아니라면 자기 이야기를 쓰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중에 담겨 있는 것이어야 하며, 뼈와 살을 뚫고 자유롭게 솟아나야 한다. 흉측하지만 정직하게, 피를 토하듯, 두려움이 일어도 온전히 드러내야 한다. 작자에 대한 독자의 호감을 끌어내려는 자서전은 자서전이 아니다. 영혼의 민낯을 낱낱이 드러내 보이고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결국 독자는 작자에 대한 불편한 거부감을 안고 멀어지게 된다. --- p.74
그때까지 내가 생각하던 사랑은 홀마크 카드사의 상술 같은 것에 불과했다. 밸런타인데이 카드나 연하장 판매를 위해 부추기는 분위기 같은 것. 사랑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날 밤 내가 노렸던 것도 공짜 술, 그리고 내게 지갑을 열어 주고 함께 밤을 보낼 부자 남자였으니까. 이미 자선 행사에서 제공하는 모스크바 뮬을 석 잔이나 비웠으므로 목표 지점의 절반에는 도달한 셈이었다. 제러미 크로퍼드의 고급스러운 풍모로 볼 때 나는 그날 밤 나머지 절반 그 이상의 수확을 얻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유해 보였고, 그날 그곳에선 자선 행사가 열리고 있었으니까. 모금 행사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면 가난한 사람들은 자선 행사에 오지 않는다. --- p.77
만약 정신은 살아 있는데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신체 기능이 완전히 손상된 거라면 얼마나 끔찍한가. 생각을 표현할 수도, 외부에 반응할 수도 없는 상태. 그건 정말 상상하기조차 무서운 일이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튀어 오르듯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려서 마룻바닥을 미끄러졌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창문을 통해 빤히 보고 있었다. 시선을 나에게 고정한 채. 나는 손으로 입을 막고 뒷걸음질을 쳤다. 나를 위협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 p.111~112
주방에서 나오는데 복도에 걸린 가족사진 액자들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 아이들 사진이었지만 베러티와 제러미가 함께 찍은 것도 있었다.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자기 엄마를 닮았다. 크루만 아버지를 많이 닮은 것 같았다.
무척 단란해 보였다. 그런 만큼 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는 사진 하나하나를 눈여겨보았다. 쌍둥이 딸 둘은 각자의 개성이 있어서 쉽게 구분할 수가 있었다. 그중 활짝 웃고 있는 아이는 볼에 작은 상처가 있었다. 또 한 명은 표정에 거의 웃음기가 없었다.
아이의 볼에 있는 상처가 언제 생긴 걸까 생각하면서 아이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어쩌다 생긴 걸까. 사진들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니 유아기에 찍은 좀 더 오래된 사진이 있었다. 환하게 웃는 아이는 그때도 볼에 상처가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생긴 건가 보다. --- p.137
낯선 냄새에 눈을 떴다. 주변의 소음도 달랐다.
내가 어디 있는지는 알겠다. 나는 제러미의 집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잠자던 방이 아니었다. 안방 침실 벽은 밝은 회색인데,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벽은 노랗다. 이 층 침실의 벽 색깔과 같은 노란색.
침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에 누운 사람이 움직여서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 다르다. 이건…… 기계의 작동에 의한 움직임.
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제발, 하느님, 안 됩니다. 이건 아니죠. --- p.197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갑자기 태양이 얼어붙어 일시에 삶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는 것 같은 재앙. 그 후로는 아무리 애를 쓰며 절규를 해도 다시는 햇빛이 우리를 비춰주지 않았다.
주방 싱크대에서 닭을 씻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생닭. 다른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었는데. 잔디에 물을 주거나, 글을 쓰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아무튼 다른 일. 그런데 하필 그때 나는 생닭을 씻고 있었고, 그래서 채스틴이 우리를 떠나던 그 순간을 생각할 때마다 그놈의 구역질 나는 생닭을 떠올려야 한다.
--- p.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