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 강조하지만, 우리 사회의 가정폭력에 대한 불개입 풍조는 극복되어야 한다. 가정은 사적 영역이므로 공권력 개입은 가급적 자제되어야 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명제는, 그 가정이 가정으로서 최소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을 때에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학대하고,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폭력으로 누군가에게 고통만을 안겨주고 있다면, 그곳에는 더 이상 가정이라 불리며 보호받을 사적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이 난무하는 곳보다 더한 공적 영역은 없다. --- p.28
재판을 하다 보면, 법률의 존재나 의미를 잘 몰랐다는 주장을 많이 접한다. 실제로 많은 법규정은 전문가가 보아도 이해하기 어렵고 모호하다. 세법같이 지나치게 자주 바뀌는 법도 있다. 그러나 성범죄사건에서 수범자(受範者)에게 부과된 정언명령이나 금지규정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그리 복잡한 기술이 아니다. 간단하고 단순하다. 다른 사람의 몸을 허락 없이 만지지 말라. 폭력이나 협박, 이와 동일시할 수 있는 힘을 사용해 간음하지 말라. 무엇이 어려운가. --- p.43
피고인들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어 고래를 포획하고 유통?판매하는 것이 비난 가능성 높은 범죄라는 점을 거듭 환기하고자 함은, 도도새를 비롯해 인간의 탐욕으로 멸종되어 사라져 간 수많은 비잠주복(飛潛走伏), 그 숨탄것들처럼, 고래를 더 이상 아이들의 그림책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존재로 남겨둘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고래고기 몇 점을 앞에 두고 자연을 노래할 시인은 어디에도 없다. --- p.66~67
주 52시간 근무 시대를 맞아 이제야 저녁이 있는 삶이 왔다고 다들 호들갑이다. ‘워라밸’이니 ‘소확행’이니 정체 모를 말들이 떠돈다. 크레인기사로, 선박 용접공으로, 족장 비계공으로 허공을 떠돌고, 택시운전사로, 화물차 운전사로 양화대교를 건너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이들과 그 가족들의 소소하지 않은 유일한 행복은, 일하다 죽거나 다쳤다는 이야기가 그저 저녁 뉴스에 나오는 남의 이야기고, 일 나간 아빠와 엄마가, 장남과 둘째가 오늘도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다. --- p.91
판결을 쓰다 말고 창밖을 바라볼 때가 있다. 시골 할머니 취득시효 소송이나, 13년 전 학자금 대출 채무를 아직도 추심당하고 있는 김씨 사건이나, 임금 한 푼 못 받고 두들겨맞은 채 쫓겨난 블랑카 씨 사건과 같은 판결을 쓸 때 주로 그렇다. 창밖으로 파릇파릇한 잎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살가운 소리를 낸다. 나는 내가 쓰는 판결의 할머니와 김씨와 블랑카 씨가 나무 이파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흔하고 별볼일없고 언제 나무에서 탈락해버릴지 몰라 늘 파들거리며 자글자글 불안에 떠는 연약한 존재지만, 나무는 이파리의 광합성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소수자는 보이진 않지만 우주의 4분의 1을 구성하는 암흑물질이거나 우리 사회의 가장 변방에서 호흡하는 피부 같은 사람들이다. 왜 소수자를 보호해야 하냐고? 사실 이 질문은 처음부터 잘못됐다. 잎이 없고 피부가 없으면 유기체가 죽고, 암흑물질이 없으면 우주가 존재하지 않듯, 다수가 소수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소수자가 그들을 보호한다. --- p.116~117
보스턴 천주교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을 보도한 [보스턴 글로브]의 실화를 옮긴 영화 [스포트라이트]의 잘 알려진 대사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듯,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 이 말은 소년범을 대할 때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말이다.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한 아이가 망가지는 데도 온 집안과 마을이 필요하다. 이 아이들이 모두 엄벌을 받아야 한다면, 아이들을 유기하고, 방치하고, 학대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은 부모와 가족, 그 아이들 중 누군가와는 같은 마을 사람들인 우리도 함께 엄벌을 받아야 한다. --- p.149~150
그들이 준비한 사연의 반의반도 못다 얘기했음을 알면서도, 뒤 사건으로 채근하며 8시쯤 겨우 사무실로 올라왔다. 창밖에는 눈이 계속 내리고 무거운 이야기들은 무겁게 법원을 다시 나선다. 충실히 듣겠노라 매번 다짐하지만 빽빽한 기일표를 보면 늘 한숨이다. 성의껏 들었다는 말도 해선 안 된다. 그들의 성의는 언제나 내 성의의 백만 배 이상이다. --- p.186~187
나는 법대를 오르내릴 때마다 이 기이한 역설을 실감한다. 살인재판을 끝낸 뒤 맛있는 점심을 먹고, 강간재판을 마친 뒤 금목서 향기를 맡으며 산책을 한다. 내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라고, 다음 날이면 무자비한 학교폭력 사건을 처리할 것이다. 세상이 평온하고 빛날수록 법정은 최소한 그만큼 참혹해진다. --- p.223~224
판사는 결코 법이라는 인식의 틀을 닮으면 안 된다. 인식의 틀이 강퍅할수록 인식하는 주체는 다정다감해야 한다. 그것이 기계가 아닌 인간에게 재판을 맡기는 이유다. 판결과 재판이라는 비정한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결코 서정을 잃어서는 안 되는 모순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 p.270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한 일말의 애정과 연민조차 품고 있지 않다면, 재판이라는 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정녕 용인될 수 있겠는가. 법이 곧 정의고, 법이 곧 사랑일 수는 없지만, 법은 정의이면서 사랑일 수 있다. 법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한 치 틀림없이 설명할 수 없다면, 법은 적어도 사랑에 기반하고, 사랑에 부역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어떤 누군가는 반드시 시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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