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부모님 댁도 좀 찾아뵙고 그러세요. 혼인 맞추느라 수소문하고 고생깨나 하셨을 것 같은데. 이것 좀 보세요, 두 분 서로 나이며 사주, 궁합까지 딱딱 맞는 거. 요즘 세상에 영혼 결혼식 하는 분들이 흔치도 않은데, 얼마나 고생하셨겠어요.”
“영혼 결혼식이요? 제가요?”
“네. 고양미 씨는 어제부로 여기 천주안 씨랑 부부가 되셨고요, 양쪽 다 소멸되기 전까지 혼인 관계가 유효합니다.”
---「모든 것들의 세계」중에서
천주안이 숨을 훅 들이켰다. 손을 입으로 가져가는가 싶더니, 말릴 새도 없이 그 위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 역시 이런 얼굴로 울음을 터뜨렸었다. 오만 군데 폐만 끼치고 살아왔으니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를 여기 잡아두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고 나니 그게 너무나 소중해졌고 그리워졌으나 이제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죽은 몸으로도 다시 한번 죽고 싶을 만큼 슬펐으니까. 두고 온 모든 것이 갑자기 미치도록 고맙고 미안해서 마음이 미어질 것만 같았으니까.
---「모든 것들의 세계」중에서
팀원 뒤에 달라붙어 체력을 끊임없이 채워주고 각종 저주와 디버프를 해제하는 일은 내겐 몬스터를 직접 때려잡는 것보다 훨씬 재밌고 뿌듯한 일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디버프에 걸린 저 불행한 귀신을 그대로 놔두고 싶지 않은 건, 애인 옆에 들러붙어 나름대로 행복하게 사후 세계를 즐기며 언젠가의 소멸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건 생전의 내가 게임 중독이었던 탓이 틀림없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이놈의 오지랖. 나는 휘적휘적 앞서 걸어가는 천주안의 뒷모습을 괜히 흰 눈을 뜨고 한참 흘겨보았다.
---「모든 것들의 세계」중에서
그 안에는 도일의 마음소라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내 손바닥보다 조금 더 컸다. 소용돌이 모양으로 뾰족하게 말린 윗부분은 묽은 회색과 하늘색이 섞여 꼭 소나기가 그친 직후의 여름 하늘 빛깔 같았고, 그 아래 둥그런 구멍 안쪽은 영롱한 진주색이었다. 남의 마음소라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고 아니 이렇게 은밀하고 귀중한 걸 이런 곳에서 꺼내보아도 되나. 하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보다 더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왜 이걸…… 나한테?”
---「마음소라」중에서
나는 마음소라를 도일의 머리통이라도 되는 듯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뜻한 것을 부어준 듯 가슴이 묵직하고 발이 저절로 동동 굴러질 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때까지는 잘 알지도 못했던 사람이긴 하지만, 누군가가 내게 마음소라를 선물할 만큼 순수한 열정과 애정을 쏟아붓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마치 내가 중요한 사람, 가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으쓱한 기분.
---「마음소라」중에서
도일의 방식은 내가 지금까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고, 나는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으레 이렇게 하는가 보다 하고 받아들인 거였다. 마치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는, 무한대로 돈이 들어 있는 통장을 얻은 것처럼 나는 방탕하게 사치를 부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세상에 그런 것은 없었다. 남에게 받은 것 가운데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것은 없고, 돌려줄 방법을 모른다면 애초에 받아서도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마음소라」중에서
“우리 집 요정이 돈이 될 것 같아.”
“돈? 돈이 된다고?”
“응, 그것도 큰돈이.”
흥분한 우진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좌우간 요정을 앞에 두고 할 만한 얘기는 아닌 것 같아, 나는 도로 일어서서 요정을 달랑 들어 안았다. 고양이 앓는 소리를 내며 팔에 엉겨 붙는 요정을 안방 침대에 앉혀두고 돌아와 다시 물었다.
---「페어리 코인」중에서
작정하고 친 사기에 당했다는 그 자체보다도, 당하는지도 모르고 바보같이 행복해하던 그 순간만 생각하면 나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가슴을 쥐어뜯곤 했다. 그러니까 그때였다. 우리가 치즈를 썰고 와인을 따르던 그때. 거실에 시폰 커튼을 달지 나비 주름 커튼을 달지, 빔프로젝터를 사면 잘 쓸 수 있을지 행복한 입씨름을 하던 순간에. 그 순간 겨우 몇 블록 떨어진 부동산에선 뱃속 검은 인간 셋이 모여 우리의 피 같은 돈 4억을 홀라당 저들 입에 처넣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우리에게 사기를 치려고 작정했을까. 우리의 무엇이 저들에게 사기를 쳐도 되겠다고 판단하게 했을까.
---「페어리 코인」중에서
내가 당한 그대로 돌려주는 것, 이보다 더 유쾌한 복수가 어디 있을까. 물론 잘못된 생각이었다. 우리를 등쳐먹은 인간들과 페어리 코인을 매수해서 손해를 볼 사람들은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그야말로 한강에서 맞은 뺨을 종로에서 화풀이하는 격이었다. 그러나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1년이 넘도록 실컷 가슴앓이를 해오는 동안, 우리 부부는 어느새 가해자의 실체를 한없이 넓게 뭉뚱그리고 있었다. 가장 못된 건 짬짜미를 한 집주인과 중개사 패거리겠지만, 과연 그들만이 나쁜가 하면 그건 단연코 아니었다.
---「페어리 코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