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에서는 "여행을 통해 정서 지능이 상승한다."고 말 한다. 정서를 강렬히 표현하는 타인을 바라보며 타인의 정서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법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수준이 높아지면 자연히 자신의 정서를 조절하고 타인의 정서에 대처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고 이 와 관련된 기술이 향상된다. 왜 여행을 통해 아이들의 EQ가 상승할 수밖에 없는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다.
--- p.14
그렇게 아이는 여행지에서 맞닥뜨린 사건들에 오래도록 골똘히 사유했고 그 기억 안에 머물렀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오면 어김없이 한 뼘씩 자라 있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은 최고의 인문학 수업이라는 것을, 아 이 손을 붙들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그것도 많이 떠날수록 좋다는 것을 말이다.
--- p.15
아이 손을 잡고 섬진강을 바라보며 걷다가 편안히 벤치에 앉아 강물의 윤슬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곳. 그곳에 앉아 전라도 쪽을 바라보며 아이에게 저 너머는 전라도 땅, 이 곳은 경상도 땅이라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곳. 그리고 바로 몸 을 틀어 몇 발자국만 걸으면 광활한 해송海松 숲이 펼쳐지는 곳. 260년 된 노송과 백사장, 섬진강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귀한 스팟이다.
--- p.38
"엄마, 하동은 참 초록색이 많은 것 같아."
그랬다. 지리산의 녹음, 푸르고 팽팽하게 자라나던 평사리 들판의 벼들, 그리고 그림 같은 차밭까지. 하동은 생명력의 고장이었다. 산세가 험해 수많은 역사를 품은 지리산과 뭇 사연들을 안고 흐르는 섬진강의 도시 하동. 아이와 나는 이 곳에서 그 생명력을 그득 충전하고 간다. 오래된 것의 힘을 영감삼고 근육삼아 돌아간다.
하동을 떠나던 날 오전에 비가 개었다. 말갛게 개인 지리 산 너머로 옅은 무지개를 보았다. 무지개를 지나 북으로 북 으로 섬진강변을 달렸다. 사라 본의 〈Over the rainbow〉가 흐르는 듯 했다.
--- p.47
그곳에선 도시에서 꽁꽁 쓰던 마스크도, 불이 나게 울어대던 휴대전화도, 15분 단 위로 확인하던 시계도 필요 없었다. 그저 눈을 뜨면 밥을 짓고 옆집 할머니가 텃밭 에서 따 건네주시는 제철 채소로 반찬을 버무리고 찌개를 끓였다. 봄이면 지천에 핀 꽃을 보듬고 여름이면 매일 같이 마당 수영장에 물을 받았다. 가을에는 집 앞 논으로 나가 추수하는 농부 아저씨들을 구경하고 겨울이면 이불 아래 발을 묻고 화로 에 고구마를 구웠다. 날씨가 맑아서, 맑지 않아서, 비가 내려서, 내리지 않아서 아름다운 나날이었다.
--- p.65
세렌디피티(Serendipity). 뜻밖의 발견, 의도하지 않은 발 견, 운 좋게 발견한 것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 문학에서 가장 티 없이 순수하고 맑은 작품의 배경이 되었을 만큼 목가적인 마을 양평. 그 아름다운 마을에 친구가 집을 구하고, 코로나 19로 인해 입국이 좌절되고, 마침 번아웃이 찾아온 내게 그 집을 맡긴 것은 세렌디피티였을까?
그것이 우연이었든 필연이었든 중요한 것은 가장 절실할 때 세런디피티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과감히 잡을 수 있는 사람에게 찾아간 다는 것이다.
--- p.70
철학자이자 시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오전에 한 시간, 오후 에 세 시간을 걸었다. 하루에 여덟 시간을 걸을 때도 있었다. 이런 생활을 10년간 이어나가며 역작들을 써내려간 그는 "걸음에서 잉태된 생각만이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길은 사색을 열어주는 마법의 문 같다. 서울처럼 한시도 눈을 떼기 어려운 도시라면 더욱, 모던의 물결로 흥청이던 경성 한복판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 p.78
모던 조선은 경성부청(서울시청)을 기준으로 분위기가 나뉘었다. 명동 쪽으로 가면 화려한 모던의 문화를 꽃피웠던 카페, 다방들이 즐비했고(구보 씨도 소공동에 위치했던 최초 의 다방 〈낙랑파라〉에서 가배차(커피)를 마시며 글을 쓴다.) 덕수궁 길을 따라 올라가면 '학교 길'로 불렸던 정동길이 나온다. 정동교회를 오른 편에 두고 오르막길을 오르면 김소월이 다녔던 배재고등보통학교가 남아 있다.
--- p.87
문이 열리자마 자 치킨 파니니와 커피를 주문하고 100년 전에는 경양식집이었다는 벽돌집을 둘러본다. 양식과 가베차를 즐기는 모던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자고 나면 핫플들이 나고 지는 이 패스트 시대에 이런 제 가치를 뽐내는 노포를 즐기는 일은 우리 일상을 풍요롭게 한다. 세월이 만든 아우라와 이야기를 소유하는 것. 그것은 좋아하는 일을 오래도록 애써 할 수 있는, 한사람을 오래도록 사랑할 수 있는, 아이와 지치지 않고 매일 웃을 수 있는, 그리하여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 지금 이대로의 나로 오래도록 머물러도 좋다고 말해 준다.
--- p.95
전사에서 완벽에 가까운 장군으로 평가받는 이순신은 리더 십 면에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촌각에 생사가 갈리는 전장에서도 병사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 성했고, 병사가 백성의 것을 훔쳐 먹었을 때 대신 갚아주는 등 자애로운 모습도 자주 보였다. 병사들도 그런 이순신 장군을 경외했고 물자가 턱없이 부족한 때에도 '이순신과 함께 라면 해볼 만 하다.' 라며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런 병사들이 있었기에 조선 수군은 전설로 남을 수 있었다.
역사를 바꾼 인물들의 인사이트를 뜯어보는 것은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울림 있는 지침이 되어 준다.
--- p.117
10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작은 간이역은 당시 농촌 지역 소규모 간이역사의 전형적 건축양식을 간직한 채 어여쁜 자 태로 서 있다. 아이와 그곳을 둘러보며 비록 뼈아픈 역사를 안았지만 오래도록 그곳에 그렇게 있어주길 바랐다. 그리하여 내 아이의 아이 또한 부모의 부모의 부모들이 살았던 옛 일을 알고, 느껴볼 수 있기를.
--- p.142
"목적지는 목적지에만 있지 않다.
잡은 손 사이로 피어오르는 웃음소리, 구름 사이로 흩어지는 너의 말소리, 그 잡고 싶은 시간 속에 목적지가 있다."
--- p.146
사랑은 쉽게 지고, 절망은 문득 덮치며, 가을은 성큼 다가온다. 힘겹게 싹을 틔우고 애써 봉우리를 돋우며 기특하게 피어나 찬란하게 만개하는 꽃의 낙화는 순간이다.
번아웃으로 시골생활을 할 때 아끼던 수국이 있었다. 오전 산책길에 보듬고 들어와 점심을 지어 먹고 나갔더니 시들어 있었을 때의 그 상실감이란. 시인은 그 자연 앞에서의 유한함과 인간사의 평행이론에 주목했을 것이다. 선운사에서 이 시를 쓴 시인이 본 꽃은 봄꽃이 아니라 이 꽃이 아니었을까? 가을의 선운사를 온통 붉게 물들이는 이 꽃말이다.
--- p.152
가을의 고창은 뒤안길에 있었다. 한 시인은 낙화의 아쉬움 을 노래했고, 또 다른 시인은 쭈글쭈글 시들어버린 여인 외할머니의 따스한 품을 노래했다. 그 떨어지는, 뒤돌아선, 뒤안길에 있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떨어진 꽃은 찬란하던 시절의 뜨거운 추억을 안고 사그러져 간다. 윤기를 잃고 쭈글해진 외할미는 저가 더 시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사랑을 퍼다가 준다. 뒤안길에 있는 것들에는 그러한 힘이 있음을, 희생의 고귀함이 담겼음을 아이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아이도 언젠가는 알고, 탄복하고, 귀히 여길 그 가치에 대하여.
--- p.163
이곳에 가면 그립던 기차여행의 낭만이 고스란히 남아있 다. 작은 대합실에서 언 손을 호호 불며 기차를 기다리던 기 억, 기차가 지나가면 철도원의 손짓에 따라 철길을 밟아 건 너던 기억, 기차가 들어오던 순간의 거친 바람, 차창 밖으로 지나던 바다, 유독 달던 커피 한잔의 맛, 화장실에 오가다 보 던 거센 바퀴의 움직임.
--- p.178
세종이 잠시 피로를 의탁했을 초정리 온천에 아이와 발을 담그고 앉았다. 세종은 그곳에 몸을 의탁했을지언정 뇌와 심장은 쉼 없이 많은 일을 했을 터였다. 비워야 채워지는 법이 다. 하반신을 관통해오는 온천의 따스한 기운에 정신을 내어 맡겨 보았다. 그곳에서 내려다 본 청주는 과연 국왕들의 간택을 받기에 부족함 없이 청명했다. 그대로 좀 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았다.
--- p.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