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야든 꿈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자신의 재능에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각각의 분야마다 빛나는 재능을 지닌 이들이 꼭 눈에 띄기 마련이니까. 재능을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로, 고정불변한 것으로 규정하다 보면 주변의 누군가와 비교를 거듭하게 된다. 심적 괴로움이 솟아나고 조바심이 난다. 그러니 재능이라는 말의 영역과 스펙트럼을 더 넓게 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재능의 유무로 자신을 재단하기 전에.
---「재능이 없다고 꿈을 접어야 할까」중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작은 과업에 집중하는 순간, 그 찰나의 고요함은 마음의 평안을 가져온다. 내가 게으름과 무기력에 빠졌을 때는 대부분 그 작은 순간의 중요성을 잊은 때였다. 무기력증은 크나큰 성과를 이루고 싶은데 실패가 두려울 때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기대한 성과를 어차피 이루기 어렵다는 생각에 혼란이 오고, 인생의 방향키를 잃은 느낌에 무기력한 기운도 다가왔다. 생각을 정리해보니, 인생의 방향키를 다시 나에게 가져오는 데 핵심이 있었다.
---「게으른 완벽주의자의 무기력 대처법」중에서
루소의 이야기를 되짚어보면 타인이 평가하는 바와 다르게 화가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갔음을 알 수 있다. 타인의 평가는 끊임없이 나를 시험대에 오르게 만든다. 이 시험대는 내가 주도권을 쥔 공간이 아니다. 이 공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면, 타인의 사소한 평가에도 마음이 휩쓸린다면, 내가 주도권을 쥔 시험대를 새롭게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타인의 평가에 휩쓸리지 않으려면」중에서
로트레크의 자화상을 보며 자존감에 대해 생각해본다. 현실을 축소하거나 확대하는 왜곡된 렌즈를 버리고, 현실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 ‘나를 사랑하자’는 구호를 과장되게 외치거나 자기혐오에 빠지기에 앞서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중략)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 ‘자존감 높이기’보다 ‘현실적인 기대치 쌓기’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나는 세상에서 유일하고 특별하며 가치 있는 존재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조금 내다 버리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존감 권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중에서
타고난 걸 ‘나쁜 특성’으로 규정짓고 그 뒤로 숨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내 기질을 미워하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쓰니, 하고 싶은 일에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줄어든다. 부정적이라 생각하는 기질을 핑계 삼아 새로운 일에 도전하지 못하기도 한다. 마음과 행동이 자연스럽지 않으니 쉽게 피곤해질 때도 있다. 나다운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니 나다운 행복을 느끼기도 어렵다. 그러니 한 번쯤 ‘이렇게 생겨먹은 나’의 장점을 따져보는 게 좋다. 타고난 기질을 좋은 쪽으로 해석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타고난 나를 바꿀 수 있을까」중에서
뒤샹의 작품을 보면 아무 생각 없이 무언가를 수용하고 감탄하는 느낌표(!)보다 비판적인 사고 끝에 던지는 물음표(?)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의외로 많은 이들이 세상의 주류라 여겨지는 사고방식이나 지적 권위를 지닌 사람들의 논리를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개인의 취향이라는 사적인 영역에서도 비슷한 상황은 반복된다. 우리 사회에는 ‘특정 나이대에 걸맞은 취향’에 대한 고정관념이 존재하는 듯하다. 10대, 20대, 30대 등 나이에 따라 어떤 음악을 좋아해야 하고, 갈수록 성숙하고 진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있다. 나이 듦은 반드시 ‘성숙’과 ‘진중함’을 동반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특정 연령대는 특정 문화를 좋아해야 정상이라는 편견은 정당한 사고방식일까?
---「취향에 등급이 따로 있나요?」중에서
친밀한 관계라 해도 완벽히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이를테면 성인이 되어 만난 배우자는 기질, 취향, 성장배경이 다를 수밖에 없다.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나름의 시대 배경 속에서 나름의 성장과정을 거쳤을 테고, 자녀는 이와 다른 환경에서 자라났다. 심지어 같은 부모 밑에서 함께 자란 형제라 할지라도 출생 순서와 기질이 다르기에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가 제 각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자주 잊고 네 마음과 내 마음이 같기를 바라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한다. 이는 상처를 주고받는 결과로 이어진다.
---「완벽한 인간관계에 대한 환상」중에서
디에고의 〈꽃을 파는 여자〉는 인간이 짊어져야 하는 삶의 책임과 고통에 대해 생각해보게 해준다. 그 무게를 타인이 쉽게 판단할 도리는 없다. 우리가 부러움을 표하는 타인의 삶은 멀리서 드문드문 보이는 풍경이다. 다른 사람의 인생이 꽃노래라 생각하는 만큼 내 삶을 비루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자괴감과 열등감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누군가의 인생을 원거리에서 함부로 평가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사는 게 놀이터인 사람은 없다는 사실」중에서
라르손의 그림을 보며 깨닫는다.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에 인생의 한쪽 끝이 구겨질 수는 있으나, 통째로 손상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엉망으로 휘저어져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도 아닐 것이다. 수많은 시도와 실패가 뒤따르고, 뼈아픈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걸 뛰어넘는 선택지는 늘 존재하게 마련이니까. 냉소와 조소, 열등감, 상처의 투영을 택하는 건 비교적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 선택지 대신 사랑과 온기, 따스함이나 행복이라는 단어를 고르는 방법도 있다.
---「상처를 사랑으로 바꾸고 싶다면」중에서
‘희생’은 아름다운 단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발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한쪽의 일방적인 요구로 이루어지는 희생은 후일 희생하는 당사자에게 억울함만 남긴다. 관계 유지를 위해 한쪽이 다른 쪽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제공해야 한다면 그것은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 착취 관계에 가깝다. 혹시 관계를 유지하다 내 마음속에 억울한 감정이 고개를 쳐든다면 인간관계의 대차대조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관계에 대차대조표가 필요한 이유」중에서
호들러의 작품 속 지쳐버린 이들의 눈은 공허함을 담고 있다. 공허는 어디에서 비롯될까. 정확한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을 때 오는 경우가 많다. 특정한 목적을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나아가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동안 우리는 이따금 실수를 저지른다. 양 눈 옆을 가린 채 달리는 말처럼 시야를 좁히고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목표를 향한 전진이 맹목적인 달리기로 변질되는 순간이다.
---「열정이 번아웃으로 변하지 않도록」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