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불교를 믿는 사람들만의 일일까? 이것이 종교일까? 이것은 종교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다. 어떤 종교를 믿느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은 ‘나’의 문제이고, ‘나의 괴로움’을 해결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련된 일이다. 부처를 구한다는 것은 곧 나의 괴로움을 스스로 해결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길일 뿐이다.
--- pp.37~38
오랫동안 비밀스럽게 전해지던, 혹은 방편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했던 ‘깨달음의 시크릿’이 이제 와서 광범위하게 깨어나고 있다. ‘깨달음의 시크릿’이란 그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힐링, 웰빙, 요가, 명상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성불(成佛), 당신도 바로 여기에서 부처가 될 수 있다!
--- p.40
파도가 날씨에 따라 거세게 치기도 하고 잔잔해지기도 하지만, 무수히 많은 파도의 생멸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바다는 언제나 그대로다. 언제나 그대로인 이 바탕의 성품을 늘 한결같아 변치 않는다고 하여 여여(如如), 혹은 진여(眞如)라고 부른다.
--- p.67
본마음은 모든 것의 배경에서 그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도록 땅이 되어 주기에 마음 땅, 즉 심지(心地)라고 한다. 땅 위에서 일체 모든 존재가 생겨나고 사라지지만, 땅은 그 모든 것의 바탕으로 늘 여여하게 있는 것처럼 본마음은 그렇게 있다. 이 본래마음, 내가 나온 자리, 돌아갈 자리, 이 본바탕을 설하는 법문을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고 한다. 『수심결』이 바로 심지법문이다.
--- pp.69~70
사람들은 ‘깨달음’이 어떤 로또 같은 것인 줄 착각한다. 깨닫고 나면 삶이 완전히 바뀌고, 괴로움이 한 방에 끝나 버리고, 남들과는 다른, 예전과는 다른 초월적인 힘도 생기는 등 눈부신 인생 역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깨닫는다고 해서 한 방에 모든 문제가 다 끝나 버리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깨달음 이후에 진정으로 수행이 시작된다. 수행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먼저 깨닫고 나서 수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 pp.92~93
절망스럽고 좌절할 때 우리는 ‘나는 절망스러워’라고 말하며 나와 절망을 동일시하곤 하지만, 사실 절망스러울 때 절망스러움을 아는 나가 있었고, 그 절망과 좌절하는 마음이 떠나간 뒤에도 여전히 그 절망과 좌절이 떠나갔음을 아는 ‘나’는 여기 그대로 있다. 그 ‘나’는 떠나가지 않았다. 이 오고 가지 않는 ‘나’가 진짜이지, 이 ‘나’ 위에 오고 가는 감정이나, 느낌, 생각, 몸 등이 ‘나’일 수 있을까?
--- p.156
깨달음은 이런 것이 아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지혜가 깨달음일 뿐, 이런 신통 변화하는 능력은 본질이 아니다.
--- p.181
마음공부도 보물찾기와 비슷하다. 수학이나 영어, 체육이나 음악이 아니라서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공부다. 누구나 이미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음공부라는 보물찾기는 내 바깥에 따로 숨겨진 보물이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바로 보물임을 찾는 것이다. 내가 진짜 보물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
--- p.184
이 몸을 가지고 도술을 부리고 신통을 부리고 다닌들, 병에 걸리고 늙고 죽어가는 괴로움에 빠져 있다면 어찌 그것을 참다운 신통이라 할 수 있겠는가? 견성, 돈오의 순간 참다운 공부인은 신통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노병사를 비롯한 일체의 모든 괴로움에서 문득 벗어난다.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이 더는 괴로움이 아니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신통이 아닌가?
--- p.207
시속 100km 이상의 속도로 달리던 자동차는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더라도 관성에 의해 계속 달린다. 속도가 줄어들긴 하겠지만, 완전히 멈출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동차도 이러한데,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되어 온 중생의 분별 습관은 어떠할까. 이 분별의 업습을 조복 받는 데는 더욱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 물론 브레이크를 잡는다고 당장 멈춰 서는 것은 아니다. 완전히 서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돈오하여 깨달으면 부처와 같으나, 여러 생의 습기가 깊다. 바람은 그쳤으나 물결은 아직 출렁이고, 이치는 나타났으나 망념은 여전히 침입한다”라고 하신 말과 같다.
--- p.277
생각과 분별 망상은 끊임없이 올라온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분별할 줄 모르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생각과 분별을 할 줄 알아야 우리 집이 몇 동 몇 호인 줄도 알고, 우리 집까지 가려면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알고, 회사가 어디인지도 알고, 직장 동료도 알아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분별하지 못한다면 삶을 살 수조차 없다. 그러니 어찌 분별과 생각을 없애려고 하는가? 그것은 없어질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없애서도 안 되는 것이다. 생각과 분별은 올라오지 못하도록 억눌러 놓을 게 아니라, 그 실체가 무엇인지 자각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실체가 아님을, 선악·대소·장단·옳고 그름 등으로 분별하는 그 분별의 성품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 pp.288~289
불교에서는 육도윤회의 여섯 갈래 길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진리를 닦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업을 짓는 것도 인간계에서만 가능하며, 다른 다섯 세계에서는 업을 받기만 한다고 설명한다. 이 말을 곱씹어 보라. 오직 인간계에서만, 오직 인간만이, 오직 지금 여기에 있는 당신만이 업을 짓고, 업장에서 벗어나며, 진리를 닦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나 자신, 당신만 할 수 있는 일이다.
--- pp.362~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