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가까이에 두고 볼 만한 남성성의 역사
무더운 여름날 오후, 나는 현대사회에서 남성성을 상징하는 땀방울을 현대사회에서 비남성성을 상징하는 불룩한 허릿살 위로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휴대전화에 루성옌의 메시지가 떴다. 새 책이 나왔는데 생물학적 남성인 내가 이 책의 추천사를 써주었으면 좋겠단다. 여성이 남성에게 요구하면 남성은 마땅히 칼을 뽑아 들고 달려가는 것이 중세 기사도 정신이렷다. 나는 당장 승낙했다. 루성옌이 이번에 쓴 책의 원제 ‘위험한 남성성有毒的男子氣?’에는 생물학적 여성인 저자의 입장이 잘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현대 대만사회에서 여성 권리를 외치는 목소리가 점점 고개를 드는 분위기와도 어울렸다. 제목만 보고는 역사적으로 남성성이 여성을 어떻게 억압했느냐를 비판하는 책이겠거니 생각했다. 나아가 여성이 남성성의 폭정 아래서 어떻게 각성하고 어떻게 스스로를 해방시켰는지 말하는 책일 수 있겠다고 짐작했다. 책을 펼치기 전, 나는 커피를 내려서 폭격 당할 준비를 갖췄다. 그런데 서문을 다 읽고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루성옌은 생물학적 남성이 남성성이라는 꼬챙이에 꿰인 채(이는 곧 피삽입이 아닐까)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아왔는지를 맛깔나게 써 내려갔다. 그는 역시 특별한 여성이다. 책 한 권을 써도 절대 평범하지 않다. 그는 나에게 종종 이렇게 말했다. 대대손손 물려줄 만한 책을 쓰고 싶다고. 절대로 중고서점에서 자기 책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가능하다면 늘 가까이 두고 화장실에 갈 때에도 가져가는 그런 책이 되기를 바란다고.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자, 중세에 결혼도 자위도 못하고 전쟁에도 못 나가던 성직자, 또는 발기부전으로 고소당해 법정에서 ‘성실한 여성’에게 성기능 검사를 받아야 했던 남자. 남성성이라는 저주 앞에서 남자도 주변인이나 약자로 전락했으며, 이들은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안간힘을 기울이곤 했다. 이 책에서는 남성의 가장 연약한 면도 볼 수 있다. 전쟁의 잔혹함 앞에서 남자들은 탈영을 했고 포탄 쇼크를 앓았다. 루성옌은 광범위한 자료를 바탕으로 여러 관점의 심층적인 의미를 단도직입적으로 풀어냈다. 나는 전통 사회가 남성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남성성, 남자답다는 것의 정의는 너무도 복잡하다. ‘남자는 눈물 흘리면 못써’ 같은 소소한 의미에서 ‘남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 ‘남자라면 마땅히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같은 중압감이 부여된 의미까지 여러 가지다. 남성 영웅은 남성성이 부여한 권력을 한없이 누렸다고 말하기 전에, 남성 역시 남성성 때문에 힘들게 살아왔음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남성성은 양날의 검과 같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감상이었다. 루성옌은 이 책에서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한 글자 한 글자 우리 생물학적 남성을 일깨운다. 사람들 앞에서 남성 영웅이 가져야 할 남성성을 보여주려 할 때마다 우리 스스로 남성성 때문에 겪은 고난을 기억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린 와일더처럼 남성성이란 실제로 남성을 억압해온 구호였음을 알아차린 사람도 있었다. 무엇이 여성적 특질인지, 또 무엇이 남성다운 것인지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던진다면 남성 역시 오랫동안 짊어졌던 부담과 스트레스가 줄어들 것이다.
책 속의 이 구절에서 나는 한참을 멈춰 있었다. 역사가 현재 생활에 어떤 길잡이가 된다는 말은 역사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지만, 그 구체적 방법을 제시해주는 경우는 드물다. 남성성의 역사를 더듬어가는 과정은 앞서 말했던 압박감의 근원을 찾는 것이다. 진정한 양성 평등은 남성의 특징과 여성의 특징을 다 내려놓고 남자와 여자가 참된 자유를 얻은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얻어야 양성 평등 사회가 실현될 것이다. 중앙아메리카에서 현지인이 나에게 처음 가르쳐준 스페인어 욕설은 “계집애 같은 자식”이었다. 남성 세계에서 ‘외부화’란 곧 여성으로 취급하는 것이며 ‘피삽입’ 대상으로 만들어 능욕하는 일이다. 이 책 『남성성의 역사』를 읽으며 나는 고대 그리스의 삽입-피삽입 관계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생물학적 성별과는 별도로, 남성성이 동성 사이에서 어떻게 작용해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만드는지도 알 수 있었다. 또 신사답고 예의 바른 남성성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그런 행동이 여성적 특징이라고 생각해 두려워했다는 것도 알았다. 이는 곧 사회적 역할이 소멸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생물학적 남성이 직면한 압박감을 연민하는 태도야말로 이 책의 특별함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생각해보자. 내가 처음 활동했던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은 이제 여성 혐오와 반反동성애 세상이 되었다. 여성을 멸시하고 차별하는 표현으로 도배되고 있다. 고등학교 교사인 나는 이런 현상을 보며 양성 평등 교육은 실패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플랫폼 이용자는 대부분 청년 세대일 것이다. 어쩌면 이미 가정을 이루고 직장생활을 한 지 꽤 되었는데 익명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서 활동하는 어른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 어른은 평소에는 하지 않을, 혹은 감히 하지 못할 말을 커뮤니티 게시판에서는 거리낌 없이 하곤 한다.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제법 오래 활동한 나는 그곳의 여성 혐오 혹은 동성애 혐오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궁금했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가부장 체제는 대만보다 훨씬 강력하다. 미국 인류학자 오스카 루이스Oscar Lewis가 쓴 『다섯 가족Five Families』 (1959)에 아즈텍 마을의 한 가족 이야기가 나온다. 아버지는 시절이 어려워지면서 가장의 권위가 떨어지자 가부장 체제의 힘을 이용해서 가족 내 여성 구성원을 더욱 억압했다. 어려운 시절은 가장의 ‘남성성’에 위해를 가했고 그 결과 여성 억압이 강화되고 말았다. 세계 어느 곳이든 남성은 이 일체화된 세상에서 항상 같은 문제에 직면한다. 루성옌은 이번에 서구 역사를 중점적으로 들여다보았지만, 이 주제에 있어 서구와 아시아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을까?
이 책에서 언급하는 ‘위험한 남성성’이 내가 가진 의문을 해결 해주는 열쇠가 될지 모르겠다. 루성옌은 남성 역시 가부장 체제에서 같이 억압받는 존재인데도 여성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은 사실 남성이 남성성을 잃어버린 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겪는 불안에 기반한다고 분석한다. 대만은 아시아에서 여성의 권리로 따지면 선두 그룹에 속하는 나라다. 동성결혼의 합법화, 간통죄 폐지, 그 밖에도 여성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입법적 장치가 이루어졌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러나 현재 성적이 나쁘지 않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의 ‘위험한 남성성’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일부 청소년은 남성성을 확립해가는 시기에 여자 친구를 때릴 만큼 겁 없는 남자라는 이미지를 가지려고 한다. 어떤 청소년은 여권운동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남성성을 표현하려고 한다. 이런 반응은 억압받는 남성이 남성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불안감에서 나온다. 쓰다 보니 ‘위험한 남성성’이 꼭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반지를 가진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마법 반지 같다.
생물학적 남성인 나는 생물학적 여성이 쓴 남성성의 역사를 정말로 흥미롭게 읽었다. 양성 평등을 향한 다양한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가 ‘여성의 권리’를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나는 남성 역시 억압받아 왔다는 저자의 의견에 깊이 공감한다. 동시에 가부장 체제나 남성성을 이용해 여성을 억압하는 데는 강력히 반대한다. 다시 말해,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여성 권리를 지지하는 남성’이다. 마지막으로 마음을 다해 이 책을 추천하며 오래전 케네디 대통령의 유명한 연설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끝맺으려 한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다.”
- 마야인馬雅人 (마야 역사 연구자)
이런 남성성, 위험하다!?
최근 학교의 여성 동료가 메일을 보냈다. 집안 사정으로 공동 프로젝트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남편이 보수적인 사람이라 제가 가정에 더 신경 쓰기를 바랍니다. 단순히 강의와 연구만 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나는 궁금했다. 왜 그 반대는 안 될까? 남편이 가정에 더 신경 쓰고 집중하면서 강의와 연구만 하는 건 안 될까? 남편은 아내가 직장생활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면 안 된단 말인가? 결혼한 지 오래된 친구에게 최근 위기가 닥쳤다. 부부 모두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인데, 어느 날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며 아내에게 집에서 나가라고 요구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마음이 떠났다면 헤어지는 게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들려온 소식에 따르면, 남편이 이혼은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혼하면 자기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하는 탓이었다. 심지어 페이스북에는 아내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올리고 가정에 아무 일도 없는 척한다고 했다. 남편의 이런 태도가 아내를 더욱 힘들게 했다.
드라마나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이야기가 현실에서 드물지 않다. 남자 주인공은 ‘사회에서 주류인 남성’ 이미지(어떤 사람은 이를 ‘패권적 기질’이라고 한다)를 유지하기 바란다. 이성애자이고 가정적이며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고 학력부터 경력까지 완벽 한 데다 부모님께 효성스럽고 사회적 이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주류 남성성이다. 사회가 그에게 바라는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남자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낸다. 그러나 이렇게 노력해서 남성의 정점에 오르려 하는 것은 주변의 누군가가 부추긴 탓 이 아니다. 자기 내면에 있는 패권적 남성성에 스스로 부합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행동과 생각이 정해진 남성성의 궤도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 있지는 않은지 시시때때로 검열하고 교정한다. 그러지 않으면 어느 틈에 ‘불합격된 남성’으로 전락할지 모른다고 불안해한다. 성공한 남자가 되는 것은 정말 고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위험한 남성성’의 영향을 받는 여성은 더욱 고통스럽다.
위험한 남성성은 중국 공산당과 같다
몇 년 전 이혼한 친구도 생각난다. 박사 학위를 받은 친구의 전 남편은 20년 동안 대학 교수 생활을 한 뒤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그는 학계를 떠나 상장사를 차리고 회장직을 맡았다. 그런데 이런 빛나는 성과를 거둔 그는 남들이 무릎을 꿇고 자기를 숭배하기 바랐다. 이혼하기 전, 친구는 남편과 함께 차린 회사의 공동 경영자였다. 회사의 크고 작은 일을 책임져야 했을 뿐 아니라 남편의 무리한 요구에 24시간 내내 시달렸다. 예를 들어 회사 경영에 필요한 능력 있는 사람을 뽑으려 하면 남편이 자기 가족을 그 자리에 앉히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식이었다. 어느 해인가 친구가 암 수술을 받았다. 남편은 병문안을 왔다가 면회를 거절당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불평을 늘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은 생각이 꽉 막혔어. 이혼하는 게 서로 좋을 지도 몰라.” 몇 달 후, 자녀들이 재촉한 끝에 친구 부부는 별거하면서 이혼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관계를 바로 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쌓인 경제적 관계나 감정 문제가 걸렸다.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좀 두려워. 이혼 후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야. 아직 열세 살 밖에 안 된 아이도 있고.” 주변에서는 경제적인 이유로 이혼을 말렸다. “지금 이혼하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어. 회사는 공동으로 세웠는데 빈손으로 떠나면 남편 좋은 일만 되는 거야.” 친구는 이혼을 할지 말지 몇 번이나 망설였다.
이후 성인인 아들의 설득으로 친구는 이혼 결심을 굳혔다. 이혼 절차를 밟는 중에도 친구는 계속 망설였다. ‘30여 년간 마음을 쏟은 일을 이대로 끝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이혼협의서에는 별다른 조건이 없었다. 다만 남편이 구두로 매달 6만 대만달러(260만 원 정도)를 위자료(미성년 자녀의 양육비 포함)로 주겠다고 약속했을 뿐이다. 친구가 몇 시간을 망설이자 담당 공무원이 집에 가서 다시 의논한 다음 방문하라고 할 정도였다. 결국 친구는 눈물을 머금고 이혼 서류에 서명했다. 서명을 다 마치고서 남편은 쓸쓸한 표정으로 공무원에게 “아내가 이혼하자고 한 겁니다. 나는 이혼할 생각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한 달 후, 그 남자는 다른 여성과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몇 주 전까지도 그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혼당했어!” 라고 말했다.
앞에서 말했듯, 남자들은 실질적인 이익(이혼) 을 얻고 싶더라도 체면을 포기하지 못한다(내 잘못이 아니라 아내 잘못이다). 친구의 전 남편은 가족이 자기 말을 따르지 않으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폭력(정신적 폭력을 포함)을 휘둘러 통제해왔다. 이혼 후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거금의 축의금을 주겠다고 약속해놓고는 결혼식 당일 그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축의금을 취소했다. 막내딸이 그와 만나 식사 하는 것을 거절했더니 당장 용돈을 끊었다. 이런 위험한 남성성의 모습은 꼭 중국 공산당과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는 ‘한 가족’ 이라고 강조하면서도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미사일을 쏘거나 백신을 제공하지 않거나 발전하지 못하게 사사건건 방해할 것이라는 태도가 말이다.
전략적 남성성
그렇다면 위험하지 않은, 해롭지 않은 남성성이 있을까? 책 속에서는 가부장 체제하에서 가장의 권위가 강한 곳일수록 패권적 남성성이 극심하다고 서술했다. 말하자면 해가 되지 않는 남성성을 찾으려면 패권적 남성성이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작용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국립대만대학 사학과의 저우완야오周婉窈 교수는 『대만역사도설臺灣歷史圖說』(1997)에서 일본이 무력으로 대만을 점령했을 때 대만 민중이 완강히 저항했다고 서술했다. “외세에 저항하는 것은 민족정신의 근간이다. 대만이 할양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만 민중은 소박하게 고향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나서서 전통 무기를 들고 근대식 군대에 맞섰다. 이기지 못할 싸움을 하는 우둔함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바로 민족이 독립과 자주를 추구하는 정신이다.” 이런 역사 서술을 두고 나는 오랫동안 생각을 거듭했다. 나는 어머니가 들려준 외할머니의 경험담으로 일제 강점기의 분위기를 가늠할 뿐이다. 외할머니는 타이난에 사셨는데, 그곳에는 도적이 그렇게 많았다고 했다. 행패가 어찌나 심했는지 외할머니가 집 앞에 앉아 있는데도 들이닥쳐서 금 귀걸이를 잡아채 빼앗았다. 그런데 일본인이 들어오자 치안이 오히려 좋아졌다고 했다.
과거에 나는 일본이 대만을 점령한 후 새로운 사회 질서가 형성되었기에 도적을 때려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우완야오 교수의 책을 읽고 나서 오랫동안 품었던 도적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 무력으로 식민주의자에게 저항하는 일은 동기가 아무리 복잡해도 중요한 것은 ‘민족정신’이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홍콩 반환일에 경찰을 찌르고 자살한 홍콩인 량젠후이梁健輝의 사례는 또 어떤가? 우리는 이런 사건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기지 못할 싸움을 하다니 어리석다고 해야 할까? 다른 시각에서 바라 본다면 이런 패권적 남성성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민주, 자유,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독재자를 뒤흔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패권적 남성성이란 평화로운 시대에는 성별 관계에서 해로운 존재다. 조직에서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고, 가정에서는 가장의 지배권을 강화한다. 하지만 식민지 시절, 외세 침략에 맞서 싸울 때는 용기, 강인함, 영예를 추구하는 남성성이 존경을 받는다. 내 생각은 이렇다. 남성성이란 관계의 맥락 안에서 전략적으로 운용해야 한다. 본질적으로 패권적 남성성은 위험하다 혹은 해롭다고 무작정 정해버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이 책에서 ‘두 차례 세계대전과 남성’ 챕터에서 보여주는 관점과 대조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챕터에서는 비슷한 문제를 두고 서양식 사례를 제시하며 또 다른 사고방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출판사에서 이 책에 추천사를 써주겠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조금 망설였다. 이런 주제를 나보다 더 잘 다룰 수 있는 학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가 루성옌이라는 말을 듣고는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예전에 그의 글을 본 적이 있었는데, 생생하고 멋진 글이었다. 평이한 언어로 복잡한 주제를 서술하는데 그것이 진짜 내공이다. 이 책은 절대로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 중세 성직자, 20세기에 전쟁 공포증을 앓는 남자들이 각각의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이 이야기는 독자들이 남성성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이해하는 동시에 유럽 역사의 변천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을 다 읽은 후 독자들도 나와 비슷하게, ‘루성옌이 쓴 동양 남성성의 역사를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 왕훙런王宏仁 (중산대학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