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을 가진 두 명 이상의 존재가 만났을 때, 양자 사이의 거리는 존중과 협의를 통해 결정되어야 모두 안전할 수 있다. 상대의 거리감을 무시하고 시선이 불쑥 들어온다면 폭력적인 상황이다. 폭력이란 타자의 영역을 동의 없이 침해한다는 의미로 이는 시선에서도 마찬가지다. 폭력이 벌어졌을 때 대상화되는 감각을 느끼는 이유는 나와 세상 사이의 입체적인 거리감을 상실하고 평면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나를 둘러싼 다양한 사물이 적정한 거리감을 가지고 있으면 잘 보이지만 눈앞으로 확 다가오면 어두운 색덩어리로 보이는 현상과 비슷하다. 성폭력 피해생존자 대상의 프로그램에서는 참여자의 동의를 묻고 확인하는 과정이 특히 중요하다. 성폭력 피해란 생존자의 생각, 감정이 존중받지 않는 경험이기에 그가 존중받아야 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그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힘이 있음을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마찬가지로 참여자가 시선의 주체임을 다시 돌려주고자 했다.
---「1부 ‘불행한 시선이 잇는 역사’」중에서
판타지 영화를 보면 ‘결계’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결계는 특정 구역을 보호하기 위해 쳐놓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림막의 일종인데, 외부의 침입자가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면 결계가 지닌 힘으로 인해 침입자는 튀웅웅웅~ 튕겨져 나간다. 결계를 뚫는 작업은 쉽지 않다. 막강한 도술과 내공을 필요로 하며, 악의 축은 어떻게 해서든 결계를 해체시키고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따라서 결계를 치는 도사들은 온갖 공력을 다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이 장막을 구축하여 자국의 영토와 하늘과 사람들을 보호한다. 문화예술계 미투 연대 활동가들이 진행하고 있는 안전망 작업, 그리고 상-여자의 착지술에서 예술을 매개로 신체주권의 의미와 쓰임새를 강화시키는 일련의 프로그램은 바로 이 결계를 치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 눈으로 보이지 않고 칼로 가를 수도 없지만 예술가들이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든든한 울타리를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1부 ‘신체영토에서 신체주권으로: 해먹 같은 결계에서 단잠 자자!’」중에서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잘 일어나는 과정은 한 사람이 몸을 다쳤다가 재활하는 지난한 시간에 비유할 수 있다. 발목이 삐었거나, 골절이 되었다면 진단에 따라 치료를 받는다. 푹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 뛰어다닐 수 있을 때까지 오래 깁스를 하고, 또 빠진 근육에 힘을 천천히 불어넣어야 한다. 안전한 길로 다녀야 하며 무리한 산행도 자제해야 한다. 작은 예시를 들었지만, 외상의 크기와 신체적 상태에 따라 다시 일어나고 회복되는 시간은 제각각 다르다. 성폭력 피해생존자가 갖는 이른바 외상 후 증상, 삶의 고통과 어려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어딘가에 살아남아 숨 쉬고 있는 몸들에 대한 존중과 경의를 표한다. 우리가 함께 만든 작은 온기와 신뢰의 반창고가 또 다른 이들에게도 붙여지기를 바란다.
---「1부 ‘예술치료사-연대인의 교차로에서: 치유의 언어 확장하기’」중에서
한 명씩 돌아가면서 서로의 몸에 기대고, 그 사람이 넘어지지 않도록 참여자들이 받쳐주고 잡아주는 과정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지지받고, 내가 또 다른 이들을 지지해 주는 따뜻하고 깊은 온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말이 아닌 몸의 연대를 통해서 충만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인상적인 경험을 “모닥불 같은 몸이 되는 거 같아요”라고 그날 일기에 써놓기도 했다. 서로 모여 있는 것들이 따듯한 기운을 만들어내는 무해한 온기와 충만감. 이 온기는 언젠간 흩어지지만 이 온기를 경험한 몸의 기억은 오래오래 지속된다. 지금이 엉망일지라도 따뜻하게 존중받는 몸의 경험에는 삶을 긍정할 수 있게 하는 마법이 있다. 방향을 잃은 몸이 땅에 두 발을 딛기 위해서 안전하게 기대고 연대할 수 있는 모닥불 같은 곁이 있다면 방향을 잃는다 해도 기꺼이 살아갈 수 있다.
---「2부 ‘방향을 잃은 몸들의 착지술’」중에서
한편 내 몸의 경계를 설정하고 내가 원하지 않을 경우 거절할 수 있으며, 내가 만든 방에서는 누구든 내 방의 사용설명서를 따라 사용해야 한다는 규칙에 대해 내가 과거에 결심했던 내용과 겹쳐지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 가해자가 내가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협박하여 강제로 당했었고, 내 몸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는 데 엄청난 치욕감과 모욕감이 들었었다. 그날 이후 나는 결심했다. 내 몸에 대한 소유권은 내게 있으며 내 허락 없이 내 몸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는 노력 없이 나에게 섣부르게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프로그램 과정마다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며, 원하고 있는가?하는 진지한 상념에 몰입하게 한다.
---「2부 ‘더 이상 숨지 않을 것이다’」중에서
2018년에 문체부와 국가인권위는 공동으로 100일간 특별조사단을 운영하면서 예술계 종사자와 대학(원)생 4,300명을 대상으로 성희롱·성폭력 실태와 제도개선안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예술인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제도가 부재한 것을 예술계 성폭력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았다. 정책과 법은 우리의 일상과 거리가 먼 듯하지만 당사자의 이런 실제 감각에서 출발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젠더폭력 전문가와 예술인의 현황 진단이 왜 달랐을까? 답은 ‘프리랜서’라는 사각지대에 있었다. (중략) 예술인은 예술활동 특성상 ‘임금을 받는 근로자’로 고용된 방식이 아닌 프리랜서 방식으로 일을 하게 되는데 약 75%의 예술활동이 프리랜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문화예술 용역이라 부르든, 저작권자라 부르든, 사업소득 세금을 내든, 제도화된 조직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인 것은 마찬가지다. 성폭력 피해자가 프리랜서라면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 한다. 피해를 어디에 신고할지, 어디서 도움을 받을지, 책임 있는 조치를 어디에 요구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으며 아는 사람도 없다. 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일상을 회복하고 폭력으로 멈추어졌던 작업과 공부를 다시 잇는 과정 또한 스스로 알아서 ‘잘’ 해야 한다. 프리랜서는 제도의 돌봄 없이 제도의 바깥에 방치되어 있다는 뜻이다.
---「3부 ‘고립에서 연결로’」중에서
이렇게 공연을 만드는 기획자로서 나는 다양한 소수자성을 가진 존재들이 무대 위에서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하는 작품을 주로 만들고 있다. 소수자성을 가진 사람들을 드러내고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 내가 예술을 하는 이유이자, 그들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방식이다. (중략) 나의 삶을 살다가 어떤 계기로 존재가 궁금해진 사람들을, 우선은 사전이 아닌 책이나 영화를 통해 알아가고, 몸을 부딪치며 일상을 공유하고, 때로는 필요한 자격증을 따기도 하고, 어떤 경우엔 함께 (예술과 상관없는) 일을 하고, 다른 프로젝트에서 만나기도 하는 방식으로 접점을 할 수 있는 만큼 늘린다. 그것이 어떤 존재를 알아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 존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때, 상대 역시 나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고, 예술이든 어떤 것이든 함께할 의향이 어느 정도 만들어졌을 때, 그제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쑥스럽게 ‘예술’이라는 제안을 던져보는 것이다.
---「3부 ‘예술의 쓸모’」중에서
나와 같은 분모의 아픔을 공유하는 여성들의 몸을 만나겠다는 의지는, 여성으로서 이곳에 살아내는 개인에게 있어 어쩌면 당연한 욕구였다. 사회적으로, 건강하기보다는 아름답기를 강요당하는 몸. 흰 살결, 크고 부드러운 가슴, 탄탄하지만 가는 허벅지로만 해부되고 그렇게만 호명되어 왔던 우리의 몸. 릴리스는 이러한 강요를 거절하고, ‘나’의 결정으로 ‘나의 몸’을 드러냄으로써 나의 몸을 긍정하는 한편으로 타인의 몸 또한 대상화와 재단의 시선이 아니라 애정의 시선으로 관찰 기록하기를 함께 시도한 프로젝트였다. 스스로를 작업자나 예술가로 호명하지 않는 여성들이 맨몸으로 각자가 사용할 카메라를 들고 모여서, 서로의 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기록을 남겼다.
---「3부 ‘작업은 느슨한 연대를 만드는 과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