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담
- 그럴 때면 소설 쓰는 사람에게는 ‘미용 티슈’가 아닌 ‘두루마리’ 같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던 선배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티슈처럼 한 장씩 꺼내 쓰는 시간이 아니라 두루마리 휴지를 둘둘 감아 꺼내듯 길게 늘이고 늘여서 쓰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말의 의미가 절절히 와닿았다.
--- p.42
- 허기가 몰려오자 아침에 일어난 뒤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대충 점심을 챙겨 먹으니 이제 내가 먹은 그릇을 닦을 차례다. 이것만 해치우고 다시 작업을 하자, 다짐하며 몸을 재게 움직여본다. 이것만, 이것만, 이것만 잠깐 해놓고 다시 작업을…… 하며 허둥대다 보니 아이가 하원할 시간이다.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아이를 맞으러 가야 하는 날이면 가슴에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갑갑했다.
--- p.44
- 살림과 집필을 동시에 잘 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늘 우리 집 상태가 깨끗하고, 식구들이 먹을 만한 것들이 넉넉하다면, 그건 내가 오늘의 작업에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나의 시간과 체력은 한정적이므로 원고 마감에 집중해야 하는 기간이면 집안은 난장판이기 일쑤다. 그럴 때면 저절로 탄식이 비어져 나온다. 하루라도 내 손이 닿지 않으면 엉망진창이 되는 이 집구석이 몸서리쳐지게 지긋지긋해지는 마음과 내가 소설만 쓰지 않으면 괜찮을 이 집구석이 애잔하게 느껴지는 마음이 수시로 교차하며 나를 짓누른다. 나는 두 가지 감정을 모두 담아둔다. 무겁고, 무거운 마음이다.
--- pp.46~47
정아은
- 이 둘이 정녕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란 말인가. 눈앞에 있는 열세 살짜리 소년, 나와 외모상으로 꼭 닮아 있으면서도 내면에는 대단히 다른 성향을 지닌 생명체의 ‘다름’이 눈부시게 빛났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면서 ‘쾌감’을 느낀다고 말하고, 물리를 배우게 되어서 속이 시원하다고 말하는 이 아이는 얼마나 놀라운가. 이 아이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희로애락의 세계는, 나로서는 그 백만분의 일도 헤아려볼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아아, 신은 ‘다름’으로 인간들이 서로를 사랑하게 만들었구나!
--- p.65
- 돌아보니 호불호의 양상은 단순하지 않았다. 나는 나와 다른 성향의 인간상을 미워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 한 켠에서, 내 성향과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이들을 ‘순수하다’고 추앙하고 동경해왔다. 나와 기질적으로 다른 존재에게 극도의 추앙과 가차 없는 비하를 동시에 가하며 살아온 셈이다. 그리고 그런 내 모순적인 평가와 그와 정확히 비례해 이루어졌던 나 자신에 대한 모순적인 평가에 대해 들여다보고 고개를 끄덕이게 해준 사람이 바로 내 작은아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 pp.66~67
장수연
- 그러니까 나의 체크리스트는 선택‘하는’ 게 아니라 다 못한 일이 포기‘되는’ 식으로 운영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또 내가 싫어하는 말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격언이다. 이런 내 허덕임을 힐난하는 것 같아 기분이 상한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게 뭐가 어때서? 하루가 끝나고 나서야 내가 뭘 선택했고 포기했는지 알 수 있는데, 살고 나서 생각하는 것 외에 무슨 수가 있나?
--- p.76
- 스물네 시간을 블록으로 나눈 일정표에 마치 테트리스처럼 스케줄을 배치한다. 이것은 곡예와도 같다. 예술의 경지에 오른 나의 일정 관리 능력을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싶은데, 내 일상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으니 그럴 일도 없다. 남편만 가끔 ‘대단하다’, ‘너 그러다 일찍 죽을 것 같다.’라고 찬사(?)를 보내준다. ‘거열형’. 죄인의 사지를 소나 말에 묶은 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진시켜 신체를 찢어 죽이는 잔인한 처형법. 어떻게 해도 도저히 일정이 정리되지 않을 때는 이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세 아이를 돌보는 일과 매일의 방송을 제작해야 하는 회사 일, 욕심껏 계약해놓은 책의 원고를 마감하는 일이 내 시간을 점유하려 제각각의 방향으로 나를 잡아끈다.
--- pp.76~77
이수현
- 휴직 시절 아이들과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아니,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아이들의 장애와 치료만 생각했다. 눈 뜨면서부터 눈 감을 때까지, 사랑스러운 아이가 내 앞에 있어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토록 원하던 아이였는데 말이다. 하루도 만만하게 넘어가는 날이 없었고, 끊임없이 아프고 힘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무언가를 해도 죄책감이 나를 지배했고, 자주 죽음을 생각했다. 반복되는 슬픔과 우울의 굴레 속에서 나는 완전히 자신을 잃었다. 아이를 낳은 것도, 아이를 치료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내 탓이었다. 행복하지 않은 마음으로 하는 육아는 아이에게도 지옥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아이들은 표정이 어두웠고, 참 많이 울었다.
--- p.97
-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아이에게 교사의 시선이 닿을 때, 그 아이뿐 아니라 교실 전체에 서서히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 감동의 현장에서 울컥 눈물이 솟구치곤 했다. 내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 희망 없는 미래를 향해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마다, 따스한 학생들의 모습은 나를 다독여주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나는 아이들을 버리고 일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고, 아이들을 위한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하는 중이라고 굳게 믿을 수 있었다.
--- p.101
황다은
- 자율성, 성취감, 연결감. 행복을 느끼는 세 가지 조건이다. 육아는 세 가지 조건을 정확히 빗겨갔다. 출산과 육아는 분명 내 선택이라고 생각했으나 내 선택이 아니라는 자각이 왔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교육받고 사회화한 결과였으니, 내 선택이 아니라 사회의 선택이었다. 남편이 밉다기보다 결혼제도가 미웠고, 가부장제의 전형을 충실히(!) 살아가는 내 자신이 누구보다 미웠다.
--- p.107
- 그런데 고백하자면 아이들을 돌보면서 그 상처가 많이 치유됐다.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을 잘라내서 확보했던 작업의 시간은 사라졌지만 아이들에게 쌓인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시간을 먹고 자란다. 그 자명한 사실이 너무도 큰 위안을 주었다. 하지만 돌봄의 시간이 치유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작업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과를 내지 못한 시간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쌓여 디딤돌이 되고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럴수록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자꾸만 쌓여갔고, 작업의 시간이 그리웠다.
--- p.112
김다은
- 아이가 성장하며 자아를 형성해가듯, 예술을 향한 예술가의 태도와 그 의미가 삶의 주기에 따라 조금씩 변모하듯, 엄마라는 정체성 역시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유기적이고 유동적인 각자의 엄마됨은 각각의 예술적 실천만큼이나 다채로웠다.
--- p.135
- 어떻게 보면 ‘예술가’라는 직업과 ‘엄마’라는 정체성은 묘하게 닮았다. 둘 다 정말 좋아서 시작한,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마땅히 소속이랄 게 없다 보니 예술가와 엄마로 살면서 문제점을 느끼고 이의를 제기하고 싶더라도 대개 개인의 범주에서 해소하고 해결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그러나 개인의 영역에서 벗어나 조금 더 넓게 바라보면 예술과 돌봄 모두 이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실천이다. 예술과 돌봄이 없는 세상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결코 가볍지 않은 노동이 분명하며, 마땅히 존중받을 가치임에 틀림없다.
--- pp.138~139
김연화
- 임신 후 내 몸은 완전히 변했다. 뭐랄까. 나는 약간 들뜬 상태의 전자처럼 불안정해졌다. 그러니까, 살짝 정신줄을 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달까. 아마 평소보다 높아진 체온 때문인 것 같았다. 한곳에 집중하기 어렵고, 운전대 앞에서 신호를 인지하며 적당히 가속 패들을 밟은 채 몸이 저절로 반응해 달려가고 있지만 적당한 때에 차선을 바꾸는 일이 살짝 버겁게 느껴지는 정도? 게다가 세상 모든 냄새 분자가 다 내 코로 들어오는지 작은 냄새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속은 메슥거렸다. 정신 집중은 안 되고 냄새는 다 내 코로 집중되고. 게다가 몸의 변화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 pp.150~151
- 과학자가 되는 과정에는 실험실을 돌보는 방식을 익히고 어느 부분에 돌봄이 필요한지 알아채는 능력을 기르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과학자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 바로 실험을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험이 가능해지도록, 더 나은 실험결과를 얻도록, 실패를 줄이고 성공하도록 하는 일이야 말로 과학자의 중요한 능력이며 여기에는 바로 실험을 돌보는 일이 포함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학자들을 실험을 돌보는 사람들로 보면 어떨까? 이와 관련해 기존 시각과 다른 부분을 찾아낼 수 있을까? 계속 질문을 던지다 보니 실험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 p.149
김은화
_ 사실 남편이 ‘빻은’ 소리를 할 때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음을 고백한다. 폭력적인 아버지, 적군인지 아군인지 헷갈리던 친오빠, 사회에서 미묘하게 성차별을 일삼던 직장 남성 동료, 온라인상에서 백래시를 펼치는 남성에 대한 적개심이 한데 포개져 남편에게 향할 때가 있었다. […] 그가 한 마디 하면 하지도 않은 백 마디 말들이 자동완성 기능으로 채워져 나는 전의가 불타오르곤 했다. 언젠가 그는 이런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너는 신문에서 접하는 타인의 선의는 믿으면서, 왜 나의 선의는 믿어주지 않아?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보여?”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나는 누구를 상대로 이렇게 화내고 있는 거지?
--- pp.169~170
_ 자신에 대한 믿음은 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자원이다. 누가 나를 이유 없이 전적으로 믿어줄 때, 나도 나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 그러니까 믿음은 성과에 기반한 후불제가 아니라, 근거 없는 선불제였던 것이다.
--- p.178
- 김잔디
아이를 키우며 드는 또 다른 고민은 부모 역할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화를 내는 순간에 드는 자괴감과 더불어 가장 힘든 부분은 비교와 피해의식입니다. 나름의 자리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중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나는 이렇게 하면서도 아이들을 챙기고 있다.'라는 말을 속으로 애써 삭히거나 남편에게 직접 던지기도 합니다. 같은 말이더라도 좀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가족은 실제 대상자(내담자)가 아니라 매번 뜻대로 행할 수가 없네요. 가족을 대상자라 생각하면 좀 더 쉬울 듯해 그렇게 마음을 먹어보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 pp.191~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