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마무리하는 동안 또 한 분의 위안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참혹하게 당했던 고통과 수모는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어떤 경우에도 고통을 준 나라와는 매국적 협상을 할 수 없다고 각인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작가의 말」중에서
6학년 때 늦봄 어느 공일 날, 다시 그 남자가 왔다. 만취한 상태였다. 그는 신발도 벗지 않고 들어와 엄마의 머리채를 잡으려 했다. 엄마가 피하자 살림살이를 집어 던지며 “이년아, 이 거머리 같은 년아, 제발 좀 떨어져라, 이 갈보 년아!”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그때 엄마가 벌떡 일어나 그 남자를 밀치면서 “이 미친 남자, 무슨 헛소리냐”고 악을 썼다. 놀라운 반전이었다. 남자는 비틀거리며 몇 번 더 헛주먹질을 하다가 부엌으로 나가 그릇들을 깨부순 후 떠나갔다. 1950년대 말경이었다. 대한민국에는 정신에 금이 간 남자들이 그렇게 많았다. 주정뱅이들은 물론, 쌀 한 톨 구해 오지 못하면서 밥솥이 보기 싫다고 망치로 깨부수는 남자들 또한 부지기수였다. 그러니까 세 번째 본 그의 인상은 힘 빠진 주정뱅이였다.
---「1장 그 남자가 죽었다」중에서
내 입에서 엉뚱한 질문이 흘러 나간다. “왜 그렇게 술만 마셨을까요?”
“세상이 자기를 괴롭혀서 안 마시면 살 수가 없다나.”
세상의 어떤 일이 그 남자를 괴롭혔습니까? 세상이 그를 괴롭힐 만큼 그가 무슨 일이라도 했습니까? 세상과 접촉하면서 살았던 적이라도 있습니까? 세상에서 준 괴로움이 나와 내 어머니입니까?
---「2장 그 남자의 아내」중에서
“피해 군사? 노예가 피해 군사다?”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
“너흰 노예들이야. 우린 돈을 주고 조선을 샀거든! 보통은 전쟁을 통해서 나라를 빼앗지. 지금처럼 말이야. 하지만 조선은 수고스러운 전쟁도 없이 헐값에 사들인 거야. 잘 들어둬. 너희 고관대작들이 조선을 팔 때 너희들을 노예로 끼워 팔았어. 그래서 조선은 세계 침략사에서도 없는 나라, 국가를 판 나라로 기록되는 거야!”
---「3장 그 남자의 전쟁 일기」중에서
전투기가 왔으나 총격 없이 사라졌다. 다시 하역을 시작해서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또 공습경보가 울렸다. 같은 일이 두 차례나 더 반복되었을 때 땅에 주저앉아 “폭격기야, 제발 좀 와서 폭탄을 내려다오. 여긴 수천의 유산탄 상자가 있다, 한 방이면 순식간에 모두 날아간다. 제발 좀 이 고생을 끝내달라”고 기도했다. 건우 형이 들었으면 큰일 날 소리였다. 목숨이 경각에 이르러도 살 생각만 하라는 것이 형의 지시였다. 미래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날을 반드시 만나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었다.
---「3장 그 남자의 전쟁 일기」중에서
“함께 귀국했지. 귀국하자마자 그 형님은 반민특위 일을 했어. 친일파들을 조사했는데 어느 날 테러를 당했다네. 대한민국 앞날을 열어가야 할 우리의 수호신이 그렇게 허망하게 당했으니……”
한영우는 고개를 앞으로 당겨오며 나직이 뒷말을 잇는다.
“이놈의 나라는 해방이 되지 못했던 거야.”
---「4장 그 남자의 친구」중에서
어머니가 명주 수건으로 싼 것을 무릎에 올려놓고 말한다. “이것이 주옥 언니가 버마 수용소에서, 귀국선에서, 부산 방역소에서 위안부들을 면담하고 기록한 내용들이다. 에미가 겪은 수모도 이 내용과 다르지 않다. 나는 나가서 바람을 쐬고 올 테니 천천히 읽어보도록 해라.”
읽고 싶지 않다. 읽기도 두렵다. 그러나 장군에 대한 궁금증이 ‘그냥 읽어!’라고 재촉해서 보자기를 풀어낸다. 노트 다섯 권이다. 나는 길게 심호흡을 한 후 첫 번째 공책을 펼친다.
---「5장 내 어머니의 고백」중에서
분례가 위안소에 온 지 닷새 만에 죽었다. 첫 주 양일간 성기 고문에 질벽 파열로 하혈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관리인이 내가 기절해서 군인을 받지 않아 그 애가 내 몫까지 받은 탓이라고 했다. 그다음 주부터 나에게 주어지는 군인은 이를 악물고 다 받았다. 하나 남은 내 친구 덕실이마저 죽일 수가 없어서였다.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고 굳게 결심했다. 서대문 감옥소 앞 영천옥에는 가끔 기자들도 왔는데 살아 돌아가서 그들에게라도 얘기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챙겨 먹었다. 군인들에게 건빵 등 군것질을 부탁했고, 군인이 많아 점심 먹을 시간이 없으면 군인이 그 짓을 하는 사이에도 주먹밥을, 건빵을, 씹어 먹었다.
---「어머니의 노트: 일본군 위안부들의 증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