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신앙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에서 출발한 쌍둥이와 같다” … 즉 과학과 신앙은 경쟁하며 서로를 해치는 적이 아니라 서로 의지하며 세상의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가야 할 동반자라는 것입니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의 차이와 다양성을 풍요의 원천으로 바라보고, 서로에게서 배우며, 두 개의 시선으로 하느님을 깨닫고 섬기는 삶으로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p.8-9, 「조환길 대주교 추천사」 중에서
우리가 ‘과학 시대의 그리스도인’으로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과학만능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과학만능주의에 관해서 총 여섯 가지 방식으로 비판적 고찰을 한 이후 결론적으로 신앙의 의미와 가치를 탐색해 볼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특히 한국의 젊은이들이 맹목적 과학만능주의로부터 벗어나 신앙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되새길 수 있도록 돕는 데에 긍정적 역할을 할수 있기를 바란다.
--- p.20-21, 「여는 말」 중에서
과학은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수많은’ 데이터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법칙, 원리를 발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관측을 통해 주어지는 데이터의 양이 많아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수많은 데이터로부터 장소,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 보편적 법칙을 찾는 것이 과학의 궁극적 목적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신앙은 인간의 역사 안에 주어진 ‘유일회적’ 계시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탄생되고 퍼져나간다. 여기서 신앙의 내용인 계시는 이 세상의 역사 안에서 단 한 번 주어지며 결코 반복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
--- p.32, 「서론」 중에서
과학은 법칙이라는 보편성의 눈으로 모든 사건들의 개별성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반면, 신앙은 특정한 계시 사건이라는 개별성의 눈으로 모든 사건들의 보편성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이렇듯이 과학은 신앙과는 사실상 정반대의 접근법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p.34, 「서론」 중에서
도킨스가 책에서 제시한 이러한 전략은 대중들에게는 성공적으로 가닿은 것처럼 보이지만, 우주의 탄생 및 지구 생명체의 탄생에서의 ‘우연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완전히 검증되거나 증명되지 않은 이론들’인 다중 우주론과 진화론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명백한 한계를 보여 준다. 다중 우주론과 진화론의 과학적 한계에 대해서는 다음 장부터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그가 이토록 다중 우주론과 진화론에 집착하는 이유는 우주의 탄생 및 지구 생명체의 탄생의 궁극적 원인으로서 의 ‘창조주’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기 위해서이다. 반면 유신론자들은 똑같은 문제에 대해 필연성으로서의 ‘창조주’를 요청하는 방식을 취한다. 결국 두 집단은 동일한 과학적 주제 안에서도 신앙과 종교에 관한 두 가지 상반된 입장에 기대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과학의 자립성이 기대하는 만큼 그다지 튼튼하지 못하며 과학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인 우주의 탄생 및 지구 생명체의 탄생에 관한 설명에서는 결국 신앙과 종교의 영향을 받는다는 증거가 된다.
--- p.48-49, 「주장 1」 중에서
다중 우주론은 사실상 과학적 이론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론이다. 왜냐하면, 다중 우주의 존재는 실험이나 관측을 통한 물리적 검증이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중 우주론이 주장하는 개별 우주들은 사실 서로 상호 작용을 할 수 없기 때문에,54 우리의 우주에서 다른 우주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의 우주 이외의 다른 우주들은 상상 속에서만 그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이 이론은 그러한 우주가 ‘무한개에 가깝게 존재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 p.70, 「주장 2」 중에서
도킨스와 윌슨의 관점은 자칫 유전자만 이해하면 모든 생명 현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소위 유전자 만능론으로 빠질 가능성이 다분하며, 특히 인간을 대상으로 고려할 경우 인류 역사에서 큰 문제를 야기한 우생학 Eugenics과 유사한 것으로 곡해될 우려가 있다. 그러다 보니 유전자 결정론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당연히 유전자의 우월적 지위보다는 생물 개체와 환경 간의 상호 작용 등 다른 요인들을 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식으로 나아간다. 대표적으로 굴드의 동료인 리처드 르원틴Richard Lewontin(1929-2021년)에 따르면, 유전자만 들여다보아서는 생명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유전자 차원, 유기체 차원, 환경과 이들의 상호 작용이라는 차원을 깊이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생명체의 본성이 제대로 이해되는 것이라 본다
--- p.107, 「주장 3」 중에서
비록 물리학은 이 세상의 대단히 많은 자연 현상을 잘 설명해 주는 학문이지만, 그러한 현상 들이 이 자연에 ‘왜 존재하는지, 왜 그러해야만 하는지, 그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못하는 근본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물리학을 포함한 과학은 다만 ‘그러한 경험적 현상들을 최대한 간단한 개념과 이론과 모델을 통해 기술하는describe 법’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학문이지 그 현상들이 왜 일어나야만 하는지, 왜 존재해야만 하는지 설명해 주는 학문이 아닌 것이다.
--- p.130-131, 「주장 4」 중에서
이러한 귀납법은 실험이나 관측 데이터를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많이 얻을 수 있는 물리학이나 화학 등의 학문 분야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귀납법이 결국 추구하는 것은 수많은 데이터로부터 얻어지는 공통적인 패턴이나 특정한 질서이기 때문에 데이터의 수가 많을수록 공통적 패턴이나 질서로 수렴되는 경향성이 커지게 되고 공통적인 패턴이나 질서에서 벗어나는 정도가 줄어든다. 하지만 물리학이나 화학과 달리 생명 과학, 고생물학, 천문학 등의 학문은 특정한 현상을 보여 주는 데이터 자체를 빠른 시일 내에 많이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귀납적 결론을 얻기가 힘들다. … 귀납적 추론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과학은 태생적으로 그 논리적 토대가 취약한 상태에서 그 위에 거대한 모래성을 쌓아 나가는 작업으로 비춰질 수 있다. 과학의 현 상황이 이러한데, ‘이러한 취약한 상향식 귀납적 과학이 과연 하향식 접근을 취하는 신앙·종교 등의 현상들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고 정당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면 과연 긍정적인 응답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 p.148-149, 「주장 5」 중에서
반실재론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가 보이지 않는 물질의 존재를 ‘믿는’ 이유는 그 물질의 존재를 받아들일 때 우리의 많은 물리적 경험에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반면, 신앙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이유는 그 하느님의 존재를 받아들일 때 우리의 많은 영적 경험에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과학 역시도 ‘믿음’ 내지는 ‘신앙’의 태도를 내재적으로 포함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따라서 반실재론의 입지가 강화될수록 과학과 종교는 신앙의 태도를 공유한 두 체계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 p.165, 「주장 6」 중에서
과학은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등의 존재론적인 질문들에 대해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가?’ 등 의미론적이거나 윤리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도 답을 주지 못한다. … 우리는 현재 과학 시대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과학이 이 세상의 모든 질문들이나 현상들에 대해 답을 해 주지는 못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p.173-174, 「결론」 중에서
과학과 종교, 이성과 신앙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가 되어 함께 나아가야 할 것이라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말씀은 앞으로 도 변치 않는 가르침으로서 강조해야 할 것이다. 또한 현재 무신론적 과학만능주의의 근간이 되는 여러 과학 이론들이 지닌 한계와 불완전성이 앞으로 과학과 종교가 서로 갈등하는 사이가 아니라 대화하고 상생하는 관계로 나아가는 데에 분명히 중요한 동력으로서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필자는 기대하는 바이다.
--- p.176-177, 「결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