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나는 대가급 작가들의 ‘장소 특정적 작품’이 곳곳에 자리한 토스카나의 와이너리부터 도시 전체가 짜릿한 예술적 체험을 선사하는 아트 페어 기간의 마이애미까지 미술계의 다양한 현장을 경험했다. 호화롭고 심오하며 때론 블랙 코미디 같았던 현장에서 관찰한 경험들은 내 안에서 예상치 못한 화학 작용을 일으키며 겹겹의 특별한 이야기들로 자리를 잡았다.
--- p.5
나는 취재를 통해 미술계를 구성하는 작가, 큐레이터, 아트 컬렉터, 아트 딜러 등을 많이 만났다. 내가 준비한 질문에 그들이 내놓은 답은 몽글몽글한 영감을 주기도 했고, 게으르고 안이한 내 인식의 지평선에 균열을 내는 도끼가 될 때도 있었다. 하나같이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가치가 있는 얘기들이었다.
--- p.6~7
이 책에 담긴 글은 내가 ‘살아 있는 생명체’로 받아들인 동시대 미술과 관련한 얘기들이며, 미술을 매개로 시시각각 펼쳐진 삶의 조각을 꿰어놓은 기록이다. 또한 미술계 내외부를 미친 팽이처럼 떠돌며 경험한 ‘아트 모먼트’를 수집한 기록이자, 매사 우왕좌왕하며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십 대 여성이 미술에 나를 투영하며 써 내려간 내면 일기이다.
--- p.8
이 재킷들은 내가 죽을 때까지 함께할 옷들이다. ‘죽을 때까지’라는 표현이 결코 지나치지 않다고 항변하고 싶다. 좋아하는 옷들은 나에게 제2의 피부이자 이상적인 자아상의 현현이며 기억의 창고다.
--- p.16~17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이 문장은 내가 좋아하는 오컬트 웹툰에서도 인용될 만큼 사랑받는다. 나는 외면을 꾸미는 일이 피상적이라고, 겉만 번지르르하다고 폄훼되곤 할 때마다 정면으로 반박하고 싶어 저 시구를 동원한다. 갖춰 입은 자신이 그 자체로 작품이었던 프리다 칼로, 단순하고 검박한 삶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대변한 조지아 오키프, ‘피부를 생성하는 행위’를 고안해낸 하이디 부허, 기억의 감각적 창고인 옷으로 작품을 만들었던 루이즈 부르주아…. 그들에게 “외관은 가장 밀도 짙은 깊이의 장소가 되었다.” 그러니 그 장소를 ‘예술적으로’ 활용한 작가들을 편애할 수밖에!
--- p.29~30
그때 선생님은 내 사주팔자의 가장 아쉬운 점이 월간과 시간에 떠 있는 정관 정화(丁) 아래 허랑방탕한 식신 해수(亥)라 하셨는데 나는 식신 쓸 때가 제일 행복하다. 식신이란, 당연하게도 식사와 음주, 대화와 접대, 필연적으로 쇼핑, 핵심적으로 ‘덕질’과 탐구, 근본적으로 언어적 표현을 말한다! MBTI로는 ENFP와도 궤를 같이하는데 미친 듯이 흥미로운 것만 추구하는 변덕쟁이라 할 수 있다. 평생 100점은 없는 대신 뭐든 금방 배워서 70점까지는 받는 게 내 장점이자 콤플렉스인데 이는 수비학의 소울 넘버 6번, 에니어그램의 7번 유형의 특성과도 일맥상통한다.
--- p.32
내 성격에 대해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이 하는 말은 대체로 비슷하다. 어떤 친구들은 “너처럼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하고, 또 어떤 친구들은 나를 ‘천하동선군’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사실 나도 누군가의 한마디에 밤잠 설치는 날이 허다하고 아직도 어떤 상실에는 끝내 회복되지 못한 여린 구석도 있다. 낯을 가리지는 않지만 진짜로 친해지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고, 스스럼없는 척하지만 너무 훅 들어오면 ‘오작동’을 일으킨다. 세상 무뚝뚝하지만 서운함이 내는 기스에 유독 취약하며, 사람 만나는 게 너무 피곤한데 사람한테서 가장 힘을 얻는다. 그렇듯 한 인간이 지닌 성격적 특성이라는 건 다채로울뿐더러 양면성을 지니는 게 아닐까.
--- p.38~39
좋은 그림을 볼 때면 감각이 동한다. 그 감각의 실체를 경험해보고 싶어서 화실에 다닌 적도 있다. 붓끝에서 전해져 오는 그릭 요거트 같은 유화의 꾸덕한 느낌과 수채화 물감을 머금은 붓이 종이 위를 스무드하게 스치면서 남기는 투명한 물기 등 회화 도구의 촉각적인 물성을 경험한 후로는 그림 보는 일이 공감각적인 매혹으로 다가왔다.
--- p.52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가 중 한 사람인 히토 슈타이얼의 기진맥진한 듯 작은 목소리는 그러나 힘이 셌다. “시각 예술의 힘은 그 누구도 어떤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 나옵니다.”
--- p.65~66
로자 로이의 작품에서는 모호함의 안개가 조금 걷히고 장난스러움이 감지된다. 로이의 그림 속에는 항상 여자들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놀이나 노동에 몰두하고 있다. 화면을 꽉 채운 빨간 부츠의 두 여인이 팽이를 치고, 남자 얼굴이 주렁주렁 달린 식물을 앞에 두고 은근한 미소를 띠며 화장을 하고, 치마를 걷어 올리고 청량한 물방울을 신나게 튀어 올리며 물고기를 잡는다. 세상이 만만하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태도의 이 여자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의 근육을 기분 좋게 펌핑해준다.
--- p.81~82
거기 모인 사람들은 매년 6월 스위스 바젤에서 열리는 아트 바젤에 가기 위해 악착같이 휴가를 모으거나 수천만 원에 이르는 퇴직금을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기 위해 ‘몰빵’하는 사람들이다. ‘영 컬렉터’라고 불리는 이들은 거대한 부를 거머쥔 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미술 작품을 구매하는 이전 세대의 컬렉터들과 다르게 자기 월급에서 일정 부분을 떼어내 작품을 구매하는 영리한 소비자였다.
--- p.122
나는 지난 15년간 패션 매거진에 소속되어서, 그리고 2017년 가을부터는 프리랜서로 독립하면서 한 달도 쉬지 않고 마감 노동자로 살아왔다. (…) 마감의 압박감에서 생겨난 민감성 대장증후군으로 30분마다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며 기사를 쓰던 에디터 초년병 시절부터 항상 노트북을 갖고 다니며 비행기, 기차, 택시 등 온갖 탈것에서 멀미로 인한 헛구역질을 삭히며 워드 파일을 열어야 하는 오늘날까지 말이다.
--- p.127
내가 제일 자주 그리고 오래 들여다보는 건 내 사주팔자인데 나는 내 사주를 이렇게 해석한다. ‘정신의 역마’에 해당하는 해수를 식신으로 쓰는 사람으로서 지금 여기를 탈주해 온 세상을 유랑하는 ‘정신머리’를 표현 도구이자 밥벌이로 삼으며 살아가는 운명. 이때 미술은 돈 한 푼 안 드는 ‘탈것’이자 ‘포털’이 된다.
--- p.159
운경고택에 들어서니 최정화 작가가 지난 30여 년간 선보인 작품들이 연못과 안채, 사랑채와 대문채에 귀신같이 자리 잡고 관람객을 반겼다. 전시 전경과 그럴싸하게 어우러지는 올 블랙으로 착장한 작가에게 인사를 건네며 “귀신같은 장소 특정적 작업인데요?”라고 하니 “워낙 공간이 좋으니까요”라고 했다.
--- p.160
카스텔로 디 아마에서 가장 최근에 추진한 아트 프로젝트는 다름 아닌 이우환의 〈토포스(발굴된)Topos(Excavated)〉이다. 계단을 통해 지하 셀러로 내려가자 자갈길로 둘러싸인 바닥에는 와인을 떠올리게 하는 붉은색 회화가, 벽에는 대칭되는 형상의 스케치가 그려져 있었다. 텅 빈 듯하면서도 어떤 기운으로 꽉 차 있는 극적인 미장센에 나는 한동안 말을 잊었다. 그리스어로 ‘장소’를 의미하는 ‘토포스’에 ‘발굴된’이라고 괄호 안에 넣었듯이 회화는 마치 발굴된 것처럼 보였다.
--- p.216~218
누가 나에게 뉴 모마에서 가장 뉴욕스러운 방을 꼽으라고 한다면 플로린 스테트하이머를 위한 509호를 첫손에 꼽겠다. 플로린은 매체를 가리지 않는 예술가인 동시에 뉴욕에서 제일가는 살롱 호스트였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으로 망명한 유럽의 초현실주의자들과 뉴욕의 아방가르드 아티스트들이 뒤섞여 현대미술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 미술계, 샴페인 향기로 가득한 파티의 나날, 예술적 활동으로 풍성한 패밀리 라이프 등을 연극적인 스타일의 그림으로 남겼다.
--- p.232
크라이슬러 빌딩에서 이스트 42번가로 코너를 돌면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이 나온다. 기차표를 사서 떠날 곳은 없었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 홀 천장의 12궁 별자리가 외지인을 환하게 맞아준다. 프랑스의 아티스트 폴 세라즈 엘뢰가 그린 이 하늘은 1980년대까지 담뱃진에 가려져 있다가 십여 년의 복원 끝에 원래의 맑은, 티파니 컬러 하늘로 돌아왔다. 12궁 별자리를 하나하나 찾아보는데 문득 외로움이 엄습했다. 별자리 생김에 대해 수다를 떨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저녁은 뭘 먹을지 함께 고민할 사람이 없다는 게 재앙처럼 느껴졌다. 맨해튼에 있는 모든 미술관에 가보겠다며 저녁 약속도 잡지 않고 보낸 지 겨우 사흘이 됐다. 외향형에 감정형인 ENFP라서 그런가? 마음을 툭 터놓을 수 있는 대화가 부재한 날들을 유난히 힘들어한다. 이럴 때는 책을 통해 작가와 내밀하고 살가운 대화를 나누는 게 큰 도움이 된다.
--- p.236
미술 애호가는 항상 길 위에 있다. 수년간 미술을 취재하면서 느낀 바로는, 미술을 좋아하는 일은 미술을 보기 위해 어딘가로 떠나고, 돌아와서는 본 것을 되새김질하듯 공부하고, 다음 여정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벌고, 또다시 새로운 여행 계획을 짜는 일의 무한반복이다. 그리고 그랜드 투어는 말하자면 성지 순례와도 같은 것이다. 2년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리는 ‘미술계의 올림픽’인 베네치아 비엔날레부터 5년마다 독일 중부의 조용한 도시 카셀을 논쟁적인 예술 격전지로 변모시키는 카셀 도쿠멘타, 십 년에 한 번 독일의 뮌스터에서 개최되는 유일무이한 공공미술 행사인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명실상부 최고의 아트 페어 브랜드인 아트 바젤의 본진인 스위스 바젤에서 열리는 ‘아트 바젤’까지. 이처럼 유럽 대륙에서 미술계 주요 행사들이 다발적으로 펼쳐지는 특별한 해의 여름에는 미술 애호가라면 카드 빚을 내서라도 비행기 표를 끊어야 하는 것이다.
--- p.240~241
2017년 그랜드 투어의 종착지는 베네치아였다. 베네치아로 넘어가 하룻밤을 보내고 맞은 아침, 나는 별안간 이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 20세기 초부터 우리의 일상을 지배해온 자동차가 마법처럼 사라진, 118개의 섬들이 4백 개의 다리로 이어진 이 물의 도시에서는 모두가 연극 무대에 오른 것처럼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 p.253
이 팔라초에서 여생을 보낸 페기는 미술과 더불어 유일하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푼 존재들인 열네 마리 강아지들과 함께 정원에 묻혔다. 강아지들의 무덤과 나란히 자리한 페기의 무덤 앞에서 잠시 인사를 했다. 그리고 페기를 향한 내적 친밀감을 가득 안은 채 정원 한가운데에 놓인 비잔틴식 석조 왕좌에 앉아 셀피를 남겼다. 찍어 달라고 할 사람이 없어 타이머를 맞춰놓고 우다다 달려가 포즈를 취해야 했는데 우스꽝스러웠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사한 옷차림에 트레이드마크였던 나비 모양의 선글라스를 쓰고 종종 이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던 페기와의 영적 도킹을 위한 의식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 p.270
그런 나에게 “그림은 나를 통해서, 밑그림도 없이, 엄청난 힘으로 그려진다”라며 보이지 않는 존재가 전한 메시지를 바탕으로 ‘정신적 왕국의 지도’를 제작했던 힐마 아프 클린트는 온 생애를 바쳐 기다려온 작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 초 영국의 테이트 모던에서 2023년 4월부터 9월까지 힐마 아프 클린트와 피에트 몬드리안의 2인전 《Forms of Life》가 열린다
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나는 런던행 항공권을 끊을 날만을 고대할 수밖에 없었다.
--- p.289
마이클 앤드루스는 프랜시스 베이컨, 루치안 프로이트 등과 함께 ‘런던 스쿨’의 일원으로 전후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인데 이 그림을 보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작가다. 몇 년 전 런던에서 열린 한 그룹전의 기사를 쓰며 출품작 이미지를 넘겨보다가 이 작품을 본 순간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 얼얼했다. 나는 부모님께 건방을 떠는 자식인데 이 그림이 매섭게 일갈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건방 떨지 마라. 너 혼자 저절로 자라지 않았다.’
--- p.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