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길 옆 집」
전철 안에서 늘 바라보게 되는 어느 서양식 주택의 기묘한 집 안 풍경. 2층 방에는 늘 세 사람이 있었다. 바느질 같은 것을 하는 노년의 여성, 신문을 읽는 중년 남성, 그리고 늘 멍하니 있는 듯 보이는 젊은 여성. 소박한 의문이 들었다. 평일 낮인데 늘 집에 있다고? 그 넓은 집에 만날 그 방에만 있다고?
「구근」
덴케이 학원에서는 학생 전원이 구근 관리를 한다. 다들 열심히 관리하며 일 년에 한 번 꽃이 피길 기다리는데, 왜 하필 튤립이냐면, 글쎄, 그냥 꽃이 예뻐서이기도 하고, 이런 동그랗고 묵직한 물건은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기 때문이 아닐까. 구근은 영양과 함께 학생들의 사념을 축적한다. 학생들은 염을 모은다. 잠자는 공주여, 깨어나라. 학생회장이여, 깨어나라.
「소요」
진짜 현실 같은 리모트 리얼(RR)의 세계! 홀로그래피나 실감 나는 영상 통화 수준이 아니다.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다. 인간이 뇌를 통해 커뮤니케이션한다는 데에서 발전된 기술이다. 요컨대 인간은 의식으로 실체를 인식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의식이 실체를 ‘만든다’는 원리다.
「아마릴리스」
나가오카 모리타로, 명문 K대학 교수. 삼십칠 년 만의 대축제 때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죽음의 원인이 아마릴리스라는 듯한데, 다들 쉬쉬하는 데다 그 이름도 말하지 말라며, 그게 무엇인지도 말을 아낀다. 그저 낮은 목소리로 아마릴리스가 아주아주 무섭다고 귀띔해줄 뿐.
「고보레히」
나뭇잎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을 일본어로 ‘고모레비’라고 한다. A의 말에 따르면 자기네 지역에서는 ‘고보레히’라고 한단다. 그리고 신사 인근에서는 고보레히를 꼭 피해다니라고들 한단다. 큰일이 난다나 뭐라나.
「나쁜 봄」
필자는 자신이 집필한 희곡 「에피타프 도쿄」에 두 사람을 초대했다. 요시야와 B코. B코가 초대면인 요시야에게 직업이 뭔지 물었다. 필자도 사실 내심 요시야의 직업이 궁금하긴 했다. 잠시 후 요시야가 부끄러운 듯 주뼛거리며 대답했다. “저기, 흡혈귀입니다.”
「황궁 앞 광장의 회전」
그는 ‘움직임’에 매료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움직이는 것’, 생명체나 동물, 자동차와 기차 같은 탈것 이야기가 아니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이파리가 좌우로 흔들거리듯 이상한 선을 그리며 낙하하는 ‘움직임’. 아스팔트 위의 물방울이 극채색으로 빛나며 중력에 의해 서서히 낮은 위치로 이동하는 ‘움직임’… 그런 움직임을 관찰만 하던 그가 어쩐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리의 바다에 뜬 우리」
매주 교장실에서는 다과 모임이 열린다. 가나에와 가나메도 몇 번째인지 초대를 받았고, 그날은 가나에가 평소 동경하는 타말라도 초대를 받았다. 차분하고 말수가 적고 접촉 공포증이 있는 아름다운 타말라. 그날의 초대객은 모두 여섯 명. 그런데 어쩐지 다른 사람들은 같은 세트의 파란 꽃무늬 찻잔인데, 타말라 것만 보라색 꽃무늬다.
「풍경(風磬)」
어렸을 때, 할아버지 댁 처마 밑에 달린 풍경이 엄청 무서웠어요. 어째선지 제가 혼자 있을 때만 울리는 거예요. 이상하죠? 하지만 사실이거든요. 오히려 바람이 안 부는 끈적한 여름날 오후, 움직임이 전혀 없는 고요한 순간에 울려요.
「트와일라이트」
이곳에 틀어박힌 뒤로 대체 얼마나 지났을까. 그날부터 세계는 어둠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이제 불을 밝힌 곳은 여기뿐. 말 그대로 세상은 암흑 속에 가라앉았다. 그러나 녀석들은 나를 끌어내려 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빛을 가진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어째 바깥이 즐거워 보이는데 살짝만 볼까?
「측은」
넌 마음 편해서 좋겠군. 너하고 바꾸고 싶다. 다들 그런 말을 해. 하도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하길래 내가 그랬거든. 그럼 당신도 나처럼 하면 되잖아. 흰 장미 향기를 맡으면서 책상 위에서 꾸벅꾸벅 졸면 되잖아. 물론 내가 그렇게 말하는 걸 알아듣진 못했나봐. 인간은 하여간 진전이 없다니까. 아, 저는 고양이입니다.
「악보를 파는 남자」
나흘간 진행되는 현악기 연주회 공연장 로비, 마흔 살 전후의 백인 남자가 악보를 진열해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스마트폰도 들여다보지 않고, ‘악보를 파는 남자’라는 조각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 문득 소박한 의문이 들었다. 팔리려나.
「구골나무와 태양」
“메리 쿠루슈마시滅理 ?衆益し!” 언제나 하늘에서 빛나며 오늘을 경계로 더욱 반짝이게 될 태양처럼 어려운 설법은 빼고 중생에게 이익이 찾아들도록, 이라는, 한 스님의 은혜로운 말씀이래요. 그리고 ‘산타’는 삼대에 걸쳐 이어지는 많은 논이란 뜻으로 ‘三田’라고도 쓰지만, 많이 낳는다는 ‘産多’란 한자로도 쓰는 거 아세요?
「첫 꿈」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내가 보는 것은 누구 다른 사람이 보는 광경이라는 것을. 누가 현실에서 보는 광경이 내 머릿속에 뛰어든다는 것을. 황당무계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직감으로 그렇게 깨달았고 그 직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가 와도 맑아도」
비가 와도 맑아도 우산인지 양산을 꼭 쓰고 다니는 그를 사람들은 ‘양산 왕자’라고 부른다. 그에게는 몇 가지 규칙이 있는 듯했다. 10시 반이면 예의 그 카페를 지나 상점가를 걷는다. 횡단보도는 반드시 흰 부분만 밟는다. 모퉁이를 돌 때면 일단 멈췄다가 정면을 향해 몸을 돌린 다음 걸음을 뗐다. 일종의 신경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10시 반에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다!
「평범한 사건」
지방 도시 F의 한 은행에서 무직의 남자가 인질극을 벌여 사상자가 발생했다. 경찰은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했지만 사건에 희생된 예순 살 전후의 여자는 신원 불명이었다. 장소가 은행이었는데도 통장, 현금카드, 휴대전화 등 소지품이 아무것도 없다니,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사건에 대한 희한한 소문이 도는데….
「봄의 제전」
발레리나로 세계적으로 성공한 동창생에게 솔로 공연을 초대받았다. 줄곧 연락을 하던 사이도 아니고, 동창들 모두가 초대받은 것도 아닌 듯했다. 왜 내게만? 그나저나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곡 「봄의 제전」은 군상극일 텐데, ‘그’는 그 춤을 혼자 추겠단다. 혼자서 제전을 재현할 수 있나?
「육교 시네마」
불확실한 소문을 처음 들은 게 언제였을까.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묘하게 관심이 가는 소문이었다. 어느 현청 소재지의 외곽에 있는 육교에 가면 스크린이 펼쳐지고, 그곳에서 소중한 과거의 기억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시 여긴가? 그럼직한 육교에 가면 나도 모르게 몇 번이고 주위를 둘러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