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로마의 영웅
1-1. 로물루스: 일곱 개 언덕에 터를 잡다
어찌 보면 아이러니하다. 그는 간통으로 태어났고, 창녀에게 길러졌으며, 친형제를 죽이고, 집단 성폭행을 주도했다. 이러한 사람이 왕으로 군림하고 신으로 추앙받아도 되는 걸까? 한편으로 그는 싸움꾼만이 아니었고, 어중이떠중이를 용사와 시민으로 거듭나게 하는 탁월한 지도자였다. 또한 사람들이 자신의 카리스마에만 의존하지 않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동의 이익에 눈을 돌리도록 하는 제도를 창설했다. 그가 보여준 개방성, 정교하고 실용적인 법의 정신, 그리고 무력이 결국 답이라는 태도는 고대 로마 내내 이어져오다 로마가 지중해를 호수로 삼으며 서양 문명의 호수가 되도록 했다. 어쩌면 건국 군주를 신성시하면서도 인간적 오점을 기록에서 삭제하지 않고, 용서하지도 않는(기록상 오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단군, 동명성왕, 박혁거세 등과 비교해보라) 로마인들의 자세가 로물루스가 세운 나라를 그토록 오래 유지하며 융성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 p.53~54
2부 로마의 황제
2-3. 네로: 제국 최고의 광대를 꿈꾸다
네로가 즉위한 때는 로마가 ‘황제란 대체 무엇인가’를 고민할 때였다. 역대 황제들은 각각의 개성으로 답을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각종 제도의 창시자였고, 티베리우스는 냉혹한 관리자였으며, 칼리굴라는 독재자였다. 그리고 개성이 불충분한 클라우디우스를 거쳐 네로에게 5대 황제의 지위가 돌아왔을 때, 그는 “세계 최고의 연예인, 모든 로마인을 하나로 묶는 상징”이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로마 황제를 연출해 보였다. 다수 백성에게 인기를 얻는 정치를 하고, 무력보다는 매력으로 권위를 유지했던 것이다. 포악한 싸움꾼보다는 인심 좋은 광대가 그나마 나은 지배자가 아니겠는가? 그가 귀족들, 지식인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히 밉보이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심한 오명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p.133
3부 로마의 여성
3-3. 코르넬리아: 위대한 어머니의 상징이 되다
코르넬리아는 영웅의 딸이고 영웅의 어머니였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그녀의 진짜 인생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감사 선물’이 되어 삼촌뻘 아저씨와 결혼하고, 남편의 뒷바라지로 청춘을 다 보냈으며, 남편이 죽은 뒤에는 오직 아들들을 위해 산 셈이다. 그녀가 걸어간 ‘삼종지도’는 과연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던 길이었을까? 당시로서는 여성이 세상에서 빛을 낼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고, 현모양처는 그 유일한 방법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 다른 방법도 썼다. 공부와 교육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그녀를 ‘위대한 어머니’라기보다 ‘문예와 교육에 재능을 발휘한 고대의 여성 지식인’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 p.194
4부 로마의 건축
4-10. 아야소피아: 솔로몬의 성전을 능가하다
537년, 프로코피우스와 함께 낙성식에 참석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자신의 의도와 상상을 훨씬 뛰어넘어 완공된 성당의 장관에 감격해 두 팔을 들고 소리쳤다.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도다!”
《성서》 에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 묘사된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 그것이 파괴된 뒤 전력을 다해 웅장하고 화려하게 재건해낸 헤롯의 성전. 그 성전마저 파괴한 로마의 황제. 그 황제의 계승자인 자신이 헤롯의 성전보다도 솔로몬의 성전보다도 더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다는, 득의와 감개무량에 젖은 외침이었다. 그가 의식했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하드리아누스의 판테온을 이긴 것이기도 했다. 크고 육중한 돔 천장이 갖는 숭고함에 꼭대기 중앙의 오쿨루스 하나로 신비함을 더하는 판테온에 비해, 아야소피아의 천장은 더 크고 더 높으며, 더 많고 더 다채로운 햇빛으로, 위를 올려다보는 모든 사람의 숨을 일순 멎게 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성당 가운데 빛의 효과를 이만큼이나 감동적으로 구현해내는 건물은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정도 외에는 달리 없다.
--- p.286~287
5부 로마의 전쟁
5-5. 스파르타쿠스 반란: 세계의 중심에서 인간임을 외치다
어떻게 “인간 이하인” 노예들의 군대가 세계 최강의 로마군을 연거푸 쓰러뜨릴 수 있었을까? 당시 로마군의 정예?주력이 이탈리아 밖에 있었음이 큰 영향을 미쳤다. 폼페이우스는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에스파냐에 가 있었고, 동쪽에서는 루쿨루스가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쌓이고 쌓인 원한과 울분, 노예로 살기보다 전사로서 죽겠다는 결의, 그런 정신에 불타고 있던 이 노예군단이 발휘했던 필사의 용맹, 그 용맹을 제대로 떨칠 수 있게 도와준 스파르타쿠스의 전술과 지도력, 이것을 주된 원인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으리라.
--- p.324
6부 로마의 기술
6-2. 시멘트: 고대 로마에도 아파트촌이 있었다
문제점은 많았다. 부실 자재를 써서 건물에 금이 가거나 붕괴할 우려가 있었고, 화재가 나면 고층 주민은 피할 길이 없었다(그래서 아예 집안에서 조리를 하지 않고, 음식을 사먹는 게 보통이었다). 냉난방 시설도 따로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1층까지만 수도관이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시거나 세탁할 물은 1층까지 내려가서 길어 와야 했고, 오물은 모아 두었다가 1층까지 가지고 내려와 버려야 했다. 그 더러움과 번거로움을 참을 수 없으면, 몰래 창문으로 쏟아버렸다! 따라서 밤에 아파트 주변을 걸어 다니는 일은 위험천만했다. 로마의 기술력이라면 고층부터 물을 대고 각 층에 두루 내려가도록 설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빈민들에게 굳이 그런 수고를 들일 의무는 없었다.
--- p.375
7부 로마의 책
7-5. 사랑의 기술: 사랑과 성에 대한 불멸의 조언들
‘이렇게 쾌락 지향적이고, 남성 우월적이고, 요즘 기준에는(당시 기준에도?) 범죄가 될 일을 버젓이 권하고 있는 책을 왜 우리가 아직도 읽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나올 법하다. 그것은 첫째, 잘 들여다보면 이 책에 로마인의 사고방식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인 데다 현세주의자이자 매사를 전쟁의 구도로 바라보는 로마인들. 사랑의 경우에도 멋진 상대를 만날 법한 곳을 찾고(지형을 살피고), 상대가 특히 좋아하는 점을 찾아내 마음에 들도록 하고(적의 약점을 찾아내 집중 공략하고), 나이가 들어 상대를 성적으로 만족시키기 어려우면 교양과 다정함으로 붙잡아두고(병력의 열세를 아군의 강점으로 상쇄시키고), 돌격할 때와 후퇴할 때를 잘 구별하고…. 오비디우스의 연애란 곧 전쟁이다.
--- p.220
8부 로마의 신
8-6. 야누스: 시작과 끝
그리스에서는 카오스에 불과했던 존재가 로마에서는 야누스로서 모든 시작과 끝의 주재자가 된다! 그것은 도시국가의 좁은 틀에 갇혀 있던 서양 문명이 로마의 칼에 의해 멀리까지 두루두루 길을 내었다는, 그 길을 따라 로마의 법과 그리스의 철학을 비롯한 문명이 온 세계에 퍼짐으로써 인류가 영광스러운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맞이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야누스야말로 ‘팍스 로마나’의 상징이었고, 많은 이들은 그 평화가 영원하기를 빌었다.
--- p.499
9부 로마의 제도
9-2. 세나투스와 코미티아: 우리가 진짜 로마다
로마 민회의 중심이 쿠리아, 켄투리아, 트리부스로 옮아가는 과정은 ‘백성이란 누구이며,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중심으로 고대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김씨네, 이씨네 식으로 혈통에 따른 부족끼리의 정체성 구별만 중요했다. 그러다가 사회가 발전하며 하나의 공동체 내에서 혈족보다 재산 소유에 따른 정체성이 더 뚜렷해지게 되자, ‘우리 부자들은 세금도 많이 내고 군 복무도 많이 하는데, 빈곤층과 동등한 권력을 누리는 일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따라 재산에 따른 국민의 차등적 체계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회가 더 커지고, 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빈자가 대립하는 구도가 뚜렷해지면서 ‘우리 가난뱅이들은 뭐냐? 시민이냐 노예냐?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자!’는 목소리에 따라 민회는 곧 평민회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 p.528~529
10부 로마의 유산
10-7. 대중오락: 콜로세움에서 만나요
국가가 ‘빵만 먹고 살 수 없는’ 개인에게 스트레스를 풀 수단도 공짜로 제공했음은 매우 특별하다. 동아시아나 중동의 왕국들에서는 국가가 백성을 가르쳐야 한다는 이념을 실천하는 경우가 있었다. 체계적이지는 않았지만, 빈민에 대한 국가 차원의 구휼도 있었다. 그러나 대중 오락을 국가가 운영해야 할 기본 사업의 하나로 여겼던 전근대 문명은 로마밖에 없다. 그것이 시민들의 정치의식을 떨어트린다고 하나, 한편 많은 사람이 한데 모이고 이야기하다 보면 오히려 정치의식이 높아지고 공론장이 형성될 수도 있었다.
--- p.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