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주나라의 왕은 자신을 ‘하늘신의 아들’, 즉 ‘천자天子’라고 주장했습니다. 주나라의 왕이 천자 드립을 치기 시작한 건 주나라 이전에 존재했던 상나라 때문이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 주나라는 상나라의 제후국이었지만, 중국대륙의 주인이 되고자 쿠데타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상나라의 왕은 자신을 ‘하늘신의 아들=천자’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주나라 왕 입장에서는 상나라를 치는 순간 신의 아들에게 덤비는 꼴이 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주나라 왕은 자기도 하늘신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한 겁니다. … 여기서 나오는 천자, 즉 하늘신의 자손은 진짜로 하늘신과 혈연으로 연결된 존재로서, 하늘신의 명령을 받아 지상세계의 인간들을 다스리는 신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다 죽으면 하늘로 올라가 하늘신 곁으로 가서 지상에 있는 자기 아들과 하늘신 사이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맡죠. 그래서 중국에서 하늘과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게 중요한 겁니다. 혹시나 하늘신께서 화가 나셔서 달래드려야 하는 경우, 하늘신과 직통으로 연결된 천자가 제사를 지내야만 한다고 만백성을 상대로 가스라이팅했죠.
--- p.21~23, 「제1장 〈도대체 중화사상이 뭐야? : 중화사상의 시작〉」중에서
중국의 몇몇 역사학자들은 중국인들이 고대시대부터 우수했고, 우월했으며, 자신들에게 주변국들이 조공까지 바쳤으니 조공국의 영토가 마치 중국의 영토였던 것처럼 주장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2017년 중국 시진핑 주석은 한국이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는 발언까지 하여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죠.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일부 한국인들은 모욕감을 느끼면서 ‘한국은 항상 독립국이었으며, 조공은 우리에게 오히려 이득을 주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선택해서 행한 것’이라는 식의 주장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듯 한국도 과거 한반도 역사를 과장하고 비틀어버린 겁니다. 효기심은 과거 역사를 두고 너무 자존심 싸움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한반도 국가들은 실제로 중국대륙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았으며, 이게 자존심을 굽히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힘의 논리로 굴러가는 국제정치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죠. 부정할 필요도, 그렇다고 긍정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한반도가 누군가에게 또 고개 숙이지 않도록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 p.91~92, 「제2장 〈고구려도 조공을 바쳤다 : 고대 한반도와 중국대륙〉」중에서
조선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끼여서 이러기도 뭐하고 저러기도 뭐한 정말 난감한 국제정치적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문제는 인조가 광해군을 끌어내렸던 명분 중 하나가 ‘명나라를 멀리하고 오랑캐 후금과 가까이했었다’는 겁니다. 즉, 인조가 뒤늦게 후금을 달래거나 친하게 지내는 게 더 이득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도, 후금과 가까워지려는 순간 자기가 집권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인조는 책봉을 받기 위해서라도 명나라의 말을 잘 들어줘야만 했습니다. 명나라도 아마 인조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1623년에 책봉을 무기로 삼아 조선을 압박하여 후금을 공격하게 만들려고 했죠. “야, 조선왕! 너 책봉 받고 싶댔지? 맨입에 해줄 순 없고 조선에 지금 모문룡 있잖아? 걔 도와서 열심히 후금 때려주면 책봉해줄게. ㅎㅎ.” 사실상 명나라 대신 조선이 피를 흘리라는 거였죠. 명나라한테 완전 약점이 잡힌 인조는 거절하기 매우 어려웠을 겁니다. 명나라를 가까이해야만 했던 인조 입장에서는 후금을 배척해야만 했던 거죠. 바로 이게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웠던 인조의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입니다.
--- p.211~212, 「제5장 〈고래 싸움에 조선 등 터진다 : 명청교체기〉」중에서
일본이라는 나라의 성장세는 화려했지만 그 이면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본 국민들은 인플레이션에 허덕이느라 고통받고 있었죠. 1차 세계대전 이후 폭등한 쌀값으로 일본 곳곳에서는 1918년 7월부터 9월까지 쌀값 인하를 요구하는 시위와 폭동이 일어납니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잘나가는 건 모르겠고 당장 먹고 살기가 힘들었으니 너도나도 들고일어난 거죠. 동시에 일본 국민들은 노동권과 참정권을 보장해달라는 사회운동도 시작합니다. 당시 일본은 일정 이상의 재산세를 내는 25세 이상의 남성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1920년 수만 명이 보통 선거권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고 1925년에 재산세 조건이 폐지되죠. 선거권이 확대되면서 일본에 민주주의가 움트고 뭔가 또 한 번 일본인들의 삶이 나아질 것 같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보통선거권이 도입되기 전인 1923년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여 도쿄, 요코하마 등 대도시가 초토화되었고, 1929년에는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일본 경제도 큰 타격을 받았죠. 이 와중에 일본 재벌과 정치인들은 서로 붙어먹기 바빴고 일본 서민들의 삶은 더 어려워지기만 했습니다. 이 타이밍에 사무라이 정권 막부 시절을 잊지 못했는지 일본 군인들 사이에서 자신들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 p.428~429, 「제10장 〈메이지유신과 천황 : 허수아비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