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연구에 따르면, 오다 노부나가 시대까지 초석은 거의 100%를, 납은 약 75%를 해외에서 수입했습니다. 게다가 일본으로 유입된 납의 산출지가 태국의 송토 광산이었다는 사실까지 밝혔습니다.
--- p.16, 「제1장 세계사 속 전국시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중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태어난 시기는 1542년 12월 26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는 음력 기준이고, 크리스트교 문명의 그레고리력으로는 1543년 2월 10일입니다. 다네가시마에 철포가 들어온 해입니다. 일본이 서구 문명과 조우한 상징적인 해이기도 합니다.
--- p.27, 「제2장 대항해시대와 전국시대」중에서
누구에게 철포를 팔 것인가? 어느 다이묘에게 초석과 납을 넘길 것인가? 이 모든 문제를 사실상 선교사가 결정하고 해결했습니다. 따라서 철포가 필요한 다이묘들은 선교사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선교사들은 거래 조건으로, 크리스트교 개종을 내걸었을 것입니다. 다이묘와 백성들이 크리스트교 개종을 받아들이면 무역의 이익도 무기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규슈에 많은 크리스천 다이묘가 탄생했습니다. 이를 일본식 발음으로 ‘기리시탄 다이묘’라고 합니다.
--- p.33~34, 「제2장 대항해시대와 전국시대」중에서
기요스 동맹 그리고 잇코잇키와의 싸움을 경험하며 이에야스는 미카와에서 중세적인 풍토를 모두 제거하고 유통 경제를 수중에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강력한 가신단을 편성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충성스러운 가신단은 이에야스가 센고쿠 다이묘로서 이름을 떨친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 p.78, 「제4장 도쿠가와 이에야스, 센고쿠 다이묘로 자립하다」중에서
납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영국 등의 상인들이 일본으로 운반했는데, 어디에 얼마나 팔 것인지를 결정한 사람은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이자 일본 포교의 책임자였던 프란시스쿠 카브랄이었습니다. 즉 일본 내의 납 공급망을 지배한 집단은 예수회였습니다.
--- p.112, 「제6장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역습」중에서
즉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도모노우라로 본거지를 옮겼다는 건 세토나이카이 내해 항로와 서일본 유통을 요시아키 본인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요시아키가 교토에서 쫓겨났다고는 하여도 정이대장군(쇼군) 직위까지 박탈당한 건 아닙니다.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쇼군이었습니다. 따라서 도모노우라에 거처를 정했다는 건 ‘도모 막부?幕府’를 개창했다고 간주해야 합니다. 실제로 요시아키는 모리 데루모토를 부副쇼군으로 정하고, 본인을 따르는 무사들을 막부 관직에 임명했습니다.
--- p.148~149, 「제8장 오다 노부나가 포위망」중에서
혼노지의 변이 있고 반년 후인 1582년 12월 14일, 발리냐노는 마닐라에 머물던 스페인 총독에게 명나라를 식민지화할 계획을 적은 편지를 보냅니다. 여기에 “일본이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구절을 덧붙였습니다. “노부나가는 명나라 출병을 거부했으나 그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 출병을 수락했으니 스페인 국왕의 뜻이 이루어질 것 같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미 이 단계에서, 히데요시는 기요스 회의의 리더이자 노부나가의 손자 산보시의 후견인으로 오다 가문 최고의 실력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발리냐노는 히데요시가 다음 천하인이 되면 노부나가가 거부한 명나라 출병 제안을 분명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 p.168, 「제9장 혼노지의 변, 그 내막과 파문」중에서
이에야스의 노선에는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 이래 이어진, 무가 정권 본연의 자세로 회귀한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물론 슈고 영국제를 그대로 부활시키는 게 아니라 다이묘들이 각자 자신의 영토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책임을 맡기자는 뜻이었습니다. 이에야스의의 방침은 남만 무역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동쪽 지방 다이묘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지지 세력과 국가 재건 방법을 둘러싼 미쓰나리와 이에야스의 대립은 서일본과 동일본의 대립이라는 색채를 띠게 되었습니다.
--- p.188, 「제10장 도쿠가와 이에야스, 난세의 패자에서 진정한 왕으로 거듭나다」중에서
저명한 근세사 연구가였던 고故 야마모토 히로후미는 “근세 일본은 무역을 적극적으로 관리했기 때문에, 엄밀하게 통제된 체제에서 필요한 무역을 실시하면서도 유럽이나 동아시아의 정치 변동이나 전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막번 체제’라는 시스템 역시 각 지역의 다이묘들이 평화를 유지하며 번영할 수 있었던, 일본만의 독자적인 지방자치 방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 p.195, 「제10장 도쿠가와 이에야스, 난세의 패자에서 진정한 왕으로 거듭나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