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윤은 갈대밭을 헤쳤다. 뛰다시피 도착한 곳에서 강심연의 나루터가 보였다. 어스름한 어둠을 밝히는 횃대와 모닥불 사이로 망자와 뱃사공들이 보였다. 곳곳에 내건 현수막이 불어오는 강바람에 펄럭였다.
살기 위한 결사 항쟁!
뱃삯 7할을 가져가는 저승! 배 수리비도 안 나온다! 임금을 인상하라!
근로 시간 준수하라! 죽지 못한다고 무시하냐!
위험천만한 뱃길! 수귀로부터 안전 보장이 될 때까지 투쟁 투쟁 투쟁!
---「배명은, 삼도천 뱃사공 파업 연대기」중에서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이 어쩌다 보니 신입 기사로, 일이 능숙해지자 다른 지점의 휴일을 책임지는 파견 기사로 계속 업무가 바뀌었다. 나름 승진이라고 생각했지만 월급의 앞자리 숫자는 도무지 변하지 않았다. 파견 기사가 하는 일은 제빵사가 쉬는 지점이 문을 닫지 않도록 대신 가서 일해 주는 것이었다. 365일 쉬지 않고 열려 있는 프랜차이즈가 가능한 게 바로 이런 시스템 덕이었다. (…) 회사가 자기들 마음대로 나를 오라 가라 하고 돈도 마음대로 주고 뺏고 휴일조차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나는 정말로 지쳐 버렸다. 내가 사표를 쓸 의사를 비치자 회사는 재빨리 나를 교육 기사로 승진(?)시켜 주었다. 고정적인 장소로 출퇴근하게 되지 생활이 한결 안정이 되었다. 그러나 쉴 틈 없이 무지막지한 12시간 노동은 여전했다.
---「은림, 카스테라」중에서
이 세계관에서 메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0에 수렴했다. 아마 어딘가에서 산재로 죽거나, 강간당하거나, 살해당하거나, 매춘을 시작하게 되거나, 강도당하거나,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나쁜 일이 메리 앞에 도사리고 있었다. 메리가 그걸 피할 수 있는 그 어떤 사회적 안전망도 없는 세계였다. (…) 물론, 열다섯의 메리가 무엇을 아는지는 몰랐다. 내가 아는 건 오직 서른 살 선경의 방식뿐이었다. 메리, 아니 선경인 나는 아픈 무릎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침묵의 세상을 깨고, 피에 젖은 깃발을 올리라는 게 직장에서의 주문 아니었던가. 그러려면 오늘 내가 만난 아름다운 소녀는 프록코트 청년의 손이 아니라 피에 젖은 깃발을 손에 쥐어야만 했다.
---「이서영, 노조 상근자가 여주 인생 파탄 내는 악녀로 빙의함」중에서
21세기 내내 사람들이 ‘의료 민영화’라 불렀던 의료 부문 영리화가 진행된 결과, 22세기 현재에 이르러 대한민국의 공공 의료 체계는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였다. (…) 병원비와 수술비 상환을 위해 설계된 30년 고정 금리 대출 상품 계약서에 서명하기 위해 홍채와 지문 정보를 입력하며, 서진은 자신의 남은 수명을 거래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서진에게 주어진 30년의 삶은 이 막대한 부채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수행될 것이었다.
---「구슬, 슈퍼 로봇 특별 수당」중에서
“이거를 까칠허다고 히야 허나. 아녀, 그냥 정상이여. 너무나 심허게 정상이지. 이 여자가 이주 노동자나 국제 결혼헌 사람이 관련된 일이라먼 아주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서는디, 우리가 아무리 안 글라고 히도 쪼매 거시기헌 부분이 있기 마련이잖냐. 암만히도 우리나라 사람이 아닝게, 이? 긍게 뭔 소리나먼, 차별을 헐라고 허는 게 아닌디 무의식적으로다가, 이? 근디 이 사람은 외국인이 쪼금이라도 부당헌 대우를 받는 꼴을 못 봐요. 들어 보먼 다 맞는 말이여. 옳은 소리고. 우리가 반성허고 고쳐야 허는 부분들이 맞어. 최 경사 같은 애들은 그 여자가 맥없이 시비만 건다고 싸우기도 허는디, 그것은 잘못이지.”
---「전효원, 살처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