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곳에 존재했기에 그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한강. 나는 서울이 물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면서 동시에 새로운 도시를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을 한강에서 엿보고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다만 한강이라는 외피, 그 피상적인 모습보다 한강의 아래(underground)에 초점을 맞췄다. 한강의 체질을 개선시키는 이른바 ‘한강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점이 그동안 한강을 주축으로 계획됐던 여러 개선 방안들과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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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인간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도래했는지 모른다. 그간 인간은 지구 자원을 꾸준히 사용했고, 그로 인한 고갈과 환경 문제로 인해 스스로 설 자리를 잃는 중이다. 물 부족과 자연 화재, 오염수 등 직면한 적 없는 문제가 산적한 이곳에서 인간은 스스로 생존할 곳을 만들어야 한다. 다만 또 다른 자원을 착취하는 형태여서는 안 될 것이다. 기존의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순환시켜 ‘살 만한’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한강이 그 열쇠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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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자연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경계를 흑백의 대비로 판단하지 않고 그 가운데를 부지런히 종횡하며 시대와 사람에게 적절한 좌표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험하는 일. 그 여러 단계의 회색 지대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공간을 감지하는 것이 건축이 하는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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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물 스트레스를 낮추기 위해선 1인당 하루 물 사용량을 줄이는 작은 습관도 중요하지만, 우선적으로 강수량의 편차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비가 퍼부을 때 많은 양의 물을 모아 두었다가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많은 양의 물을 담아 둘 물그릇이 현저히 부족하여 하천에서 바다로 막대한 양의 물을 그저 흐르게 두는 수밖에 없다. 더욱이 홍수와 침수 피해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기후위기는 이미 일상에 도래했고, 우리는 이 위기에 대처하며 지속 가능하게 살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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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에는 수도권외곽방수로가 있다. 수도권외곽방수로는 축구장 2개가 족히 들어가는 거대한 규모로 그 모습이 웅장하여 ‘지하 신전’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이다. (중략) 도쿄도는 도심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수도권외곽방수로를 포함하여 20여 개의 유수지와 지하 저류시설을 설치했으며 3곳의 지하터널식 저류시설을 갖추고 있다. 수도권외곽방수로는 도쿄 북쪽의 사이타마현 가스카베시 지하 22m에 위치한 저수시설로, 길이 177m, 폭 78m, 높이 25m로 세계 최대 규모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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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시의 물 스트레스를 낮추고 한강의 체질을 개선하는 전략으로 마케마케 프로젝트를 고안했다. 마케마케 프로젝트는 서울의 계절별 강수량의 편차를 활용해 물 활용도를 끌어올리는 시스템이다. 다시 말해서 거대한 파이프 시스템과 지하탱크 등의 ‘하드웨어’만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기후와 지역, 도시 특성에 맞추어 물을 관리하는 ‘소프트웨어’를 코딩하는 것에 가깝다. 이러한 시스템이 실현 가능하다면 서울뿐만 아니라 강을 끼고 있는 다른 중소도시에서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번 책은 마케마케 프로젝트의 신호탄으로서 서울에 한정해 구상의 정확도를 높이는 데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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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다이어트’로서 마케마케 시스템의 골자는 한강의 폭을 줄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한강은 폭에 비해 수위가 매우 낮아서 침수가 잘 일어난다. 이에 한강의 폭을 줄이고 강을 더 깊게 준설하여 한강이라는 물그릇을 바꾸고자 한다. 움푹한 모양의 접시가 얕은 접시에 비해 더 많은 양의 물을 담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한강의 폭을 약 1,200m라 하면 양쪽으로 300m씩 폭을 줄인다. 베르누이 정리에 따라 한강 물의 속력을 기존과 비슷하게 맞추기 위해서 강의 깊이를 더욱 깊게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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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주요국은 기후변화와 극한 강수를 대비하기 위해 치수 사업에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전 세계 도시는 댐이나 지하탱크 등을 신축하거나 리모델링해 하천의 물그릇을 키우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마케마케 프로젝트는 이러한 전 세계적인 노력의 연장선인 동시에, 서울의 지형과 생활 환경을 반영한 독창적인 치수 프로젝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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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모습이 전면적으로 변하기 직전인 1966년 당시 서울은 한강의 이북 지역인 강북에 국한되었다. 강남은 산등성이와 잡초가 무성한 곳이었고 거주하는 사람도 몇만 명에 불과했다. 강북과 강남을 가로지르는 방법은 나룻배뿐이었으며 한강은 백사장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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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지구 안에서 물 부족과 홍수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어느 쪽은 물에 잠겨 피해를 입고, 어느 쪽은 물이 부족해 매일을 불편함 속에서 살아야 한다.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서울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마케마케 프로젝트를 통해 물의 균형을 되찾는 우리의 작업이, 계층적으로 양극단으로 치우치고 있는 서울 시민의 삶에도 긍정적인 균형을 가져오길 바란다. 많이 가진 이들만 안전과 녹지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보편적 시민 역시 안전과 녹지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시민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집, 나아가 동네와 도시에서도 자신의 개성과 창조성을 발휘하고 영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케마케 프로젝트가 서울의 수자원 시스템을 한층 효과적으로 만들어 도시의 풍요와 균형을 가져오는 것에서 나아가 서울 시민의 삶에도 풍요와 균형을 찾는 데 일조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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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마케 프로젝트는 1~2년 안에 해치울 수 있는 단순한 미션이 아니다. 10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서 단계별로, 또 순차적으로 끌고 가야 하는 프로젝트가 되어야 한다. 지난할지도 모를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서울에는 강북과 강남을, 강동과 강서를 유기적으로 묶는 거대한 도시의 여백, 선형의 숲길이 생길 것이다. 도시의 여백은 도시에 꼭 필요한 공공공간과 건축물의 영구적 토대가 되기도 하고, 숲이 숨 쉬는 그린스페이스로도 기능하게 될 것이다. 더불어 한강은 시민들이 강수욕을 즐기던 시절처럼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여유와 쉼의 공간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한강의 지류를 따라 설치한 링로드와 지하탱크 시스템은 서울의 수자원을 효과적으로 순환시키고,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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