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왜 이렇게 우리에게 익숙하고 또 흥미로울까요? 시기적으로 가장 가깝고 풍성한 기록을 보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너진 과정 또한 잘 알려져 있기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형편없는 나라라는 인식도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의 생각처럼 자주 싸우면서, 백성에게 고통을 주기만 했다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500여 년을 버틸 수 있었을까요? 중국 왕조만 보아도 조선보다 오래 유지된 왕조는 없습니다. 이는 조선이 나름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국가로서 튼튼한 시스템이 작동되었기에 500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이죠.
--- p.6~7, 「추천의 글 _500년 조선사의 결정적 장면을 만나는 시간」중에서
황희는 76세가 되어서는 세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렸습니다. 종기로 피가 그치지 않고 어지럼증이 심하다며 한 번, 건망증이 심해서 직접 말한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며 또 한 번 자신의 사직을 요청했어요. 그리고 1438년 겨울에 세 번째 사직서를 올렸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이유를 들었을까요?
겨울철에 천둥과 번개가 심하게 치자 궂은 날씨가 이어지는 것은 높은 관직에 있는 자신이 부덕한 탓이라며 파면해 달라고 했어요. 이에 세종은 “날씨가 좋지 않음은 과인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면하지 말고 더욱더 열심히 일하도록 하라”면서 사직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 p.41~42, 「1장 벌거벗은 명재상 _조선 왕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최장수 재상 황희」중에서
이 잔혹한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습니다. 일단 궁에는 문이 많았기 때문에 조정 대신들이 첫 번째 문에 들어설 때는 하인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해 조정 대신 혼자 문을 통과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에 들어서면 신원확인을 한 뒤 김종서와 안평대군의 편에 선 사람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여기에도 한명회만의 전략이 숨어 있습니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대신들을 은밀하면서도 재빠르게 제거할 방법을 생각하고 실행한 것입니다. 한명회의 집요한 계획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살’ 명부에 올랐지만, 사정이 있어서 궁에 오지 못한 이들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 군사들을 보내서 죽였습니다. 집은 물론이고, 공사 현장에서 근무하던 신하는 그 현장으로 직접 군사를 보내 죽였지요. 살생부는 제거하려고 한 사람의 이름만 적힌 명부가 아니라, 그들의 제거 방법까지 치밀하고 완벽하게 계획된 일종의 살생 시나리오였던 것입니다.
--- p.65~66, 「2장 벌거벗은 계유정난 _킹메이커 한명회는 어떻게 조선의 왕을 바꿨나」중에서
여기에 재밌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대비가 국정을 볼 때 발을 내리는 수렴은 문정왕후 때 처음으로 시행되었어요. 문정왕후 이전에 수렴청정했던 성종의 할머니이자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는 직접 편전에 나오지는 않았거든요. 자신의 거처에서 중요한 사안을 보고받고 결정했지요. 문정왕후는 이전과 차원이 다른 수렴청정을 펼쳤습니다. 조선 최초로 직접 왕이 업무를 보는 편전으로 나와서 국정을 운영한 것입니다. 심지어 왕이 신하들과 학문을 닦고 국정을 논하는 ‘경연’에도 참석했습니다. 대신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문정왕후는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내세웠다고 합니다. 나서서 논의를 주도했고 비판은 강하게 제압했어요. 사건 사고가 끊임없던 중종 대를 거치면서 산전수전을 겪은 문정왕후는 정치 경험이 많았고 왕실에서 가장 지위가 높았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유교적 소양도 갖춘 데다가 타고난 성품이 강한했기에 신하들은 반대하는 의견을 내기 쉽지 않았습니다.
p.105, 「3장 벌거벗은 여인 천하 _문정왕후는 어떻게 절대 권력을 차지했나」중에서
광해군이 세자가 된 지 한 달 정도 되던 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선조가 아들 광해군에게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급한 상황이니 조정을 나누어 통치하자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을 ‘나눌 분’, ‘조정 조’를 써서 분조라고 합니다. 조선 조정이 둘로 나뉜다니, 대체 선조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선조는 신하들까지 불러 말했습니다.
“천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왜적의 손에 죽을 수 없으니 자신은 조선을 떠나 천자의 나라로 불렀던 명나라로 망명하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선조가 말하는 분조는 조선에서 조정을 둘로 나누자는 게 아니라 자신은 더 안전한 명나라로 가서 몸을 피할 테니, 아들 광해군은 조선에 남아 전란에 휩싸인 나라를 책임지라는 것이었습니다.
--- p.174~175, 「5장 벌거벗은 격동기의 군주 _임진왜란의 영웅 광해군은 왜 쫓겨났나」중에서
이뿐만 아니라 정약용은 또 다른 도구 ‘유형거’와 ‘녹로’도 만들었습니다. 유형거는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돌을 손쉽게 운반할 수 있는 수레였습니다. 녹로는 오늘날 크레인과 비슷한 도구로 작은 돌과 목재를 높이 올리는 데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모든 기계에는 백성들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자 한 실학자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정약용의 역량이 한껏 발휘된 조선판 신도시 수원화성! 그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요? , 「화성전도」중에서를 보면 크게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이 있고, 위쪽 중심부에는 왕이 머물던 행궁이 위치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봐도 대단히 크고 잘 만들어진 계획도시입니다.
--- p.260~261, 「7장 벌거벗은 실학자 _정약용은 어떻게 정조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었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