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내고 싶지 않은 타인의 비밀은 사람의 묘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더욱이 권력의 최정점에서 노련한 정치력을 발휘한 군주의 비밀일 때는 호기심에 그치지 않고, 근엄하고 진지한 역사를 이완시키고 이면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것만으로도 정조의 비밀편지는 가치가 있다. 게다가 이 어찰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공식 사료와 충돌하기도 하고 이들을 보완하기도 한다. 국왕이 행한 정치적 행위의 이면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졌고, 당사자들은 이를 어떻게 느꼈는지를 폭로한다. 공식사료가 결코 드러내 보일 수 없는 사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편지가 오간 4년 동안 조정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의 발생과 경과, 처리가 편지로 오간 대화 속에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는데, 공식적 역사기록에서도 볼 수 없는 비밀스런 정보가 숨어 있다. 따라서 이 어찰의 등장은 이 시대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과 사고를 요구한다. 정조시대, 나아가 조선시대의 정치적 행위와 역사서의 행간을 읽고 채우는 흥미로운 역사 읽기가 가능해졌다. --- 본문에서
정조는 개혁을 추진한 학자풍 군주로서, 조선 전기의 세종과 더불어 성군聖君 이미지로 한국인에게 각인되어 있다. 그런 정조가 보낸 비밀편지는 자신을 독살했다고 오해할 만큼 적대적 관계로 알려진 심환지를 적극적으로 회유하고, 막후에서 비밀스런 지시와 조정을 주도하는 노련한 정치가의 수완과 동태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 본문에서
정조는 학자 스타일의 군주로 세심하고 온화한 인품의 제왕으로 알려졌는데 실제로 그런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한편 그런 이미지와는 달리 정조가 다양한 얼굴을 지닌 군주라는 사실을 『어찰첩』은 폭로한다. --- 본문에서
『어찰첩』은 전체적으로 정치적 무게를 지닌 정보와 의견 들로 구성되었으나 그런 내용들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정치행위가 늘 진지하고 엄숙한 것이 아니듯이 국왕과 대신의 편지 역시 가볍고 사소한 내용이 적지 않고, 때때로 익살과 유머가 등장한다. --- 본문에서
오랫동안 근엄한 개혁적 제왕의 이미지로 굳어진 정조는 어찰첩이 출현한 이후 현실 정치가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재등장했다. 한편으로는 정조를 독살했다고 알려진 심환지에게 보낸 일련의 편지이기에 정조 독살설을 둘러싼 찬반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