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매일같이 생존경쟁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밤의 공포와 싸우는 한편, 스스로를 돌아보며 육체와 정신 양면에서 어떤 소질을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성, 정의, 몸의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조화로운 완전성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사고와 감각의 소질을 발전시킬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은 이 필요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를테면 신화를 통해서, 춤과 노래를 통해서, 철학체계를 통해서, 그리고 시각적인 질서로 채워왔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의 소산은 동시에 이상의 표현이기도 했던 것이지요.
--- p.24
사카라의 피라미드 이래 사람들은 건축물을 지면이 받는 무게로만 생각했습니다. 건축물을 물질적 특성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비례나 값진 대리석의 색으로 꾸며서 물질을 뛰어넘는 건축물을 만들려고 애썼지만, 언제나 안정성과 무게라는 한계에 부딪혔지요. 결국 그것이 인간을 지상에 붙들어 두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고딕 양식의 다양한 (...) 장치는 마치 돌이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중력에서 해방된 인간 정신의 표현이었습니다.
--- p.88~89
2차원의 예술, 가령 태피스트리의 예술은 매력적입니다. 그런데 태피스트리에 담긴 독자적인 세계를 받아들이려면 관객은 자신의 신념을 잠깐 정지시켜야 합니다. 태피스트리를 만든 예술가는 자신의 공상을 2차원의 표면에 펼쳐놓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었습니다. 제한된 완전성에 도달하자 거기에 고착되고 말았지요. 그러나 3차원, 즉 공간과 입체성을 도입하면 그 순간부터 확장과 발전의 가능성이 무한하게 펼쳐집니다.
--- p.116
이 조각상에 표현된 육체는 말하자면 베토벤의 아홉 번째 교향곡의 그 유명한 도입부처럼 대리석 속에서 울려 나오고 또 대리석 속으로 가라앉고는 합니다. 표면이 다소 거친 대리석은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어두운 그늘과 그림자가 그런 것처럼, 가장 강렬하게 느낄 부분에 주의를 집중시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조각된 인물을 가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그 인물은 손발이 묶이지 않았지만 어느 시대에나 죄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완성된 〈노예〉와 마찬가지로 이 조각상은 미켈란젤로가 무엇보다도 깊이 몰두했던 문제, 즉 스스로를 물질에서 해방시키려는 영혼의 고투를 나타낸다고 여겨집니다.
--- p.178
종교는 모두 웰스가 말한 복종의 사회였습니다. 웰스가 말한 의지적 사회, 즉 이스라엘이나 이슬람 혹은 북유럽의 프로테스탄트처럼 공격적이고 방랑적인 사회는 자신들의 신을 남성으로 여겼습니다. 남신만 있는 종교에서는 우상이 나오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우상을 적극적으로 금했다는 점은 기묘한 노릇입니다. 세계의 위대한 종교예술은 여성 중심의 창조원리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 p.244
이성과 경험에 대한 호소가 처음 빛을 발하던 한 세기 동안에 거둔 성과가 인간 지성에서 하나의 승리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데카르트와 뉴턴의 시대에 살았던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사색의 도구로 세상의 다른 지역 사람들과 자신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19세기의 평범한 역사가들을 조사해보면 유럽 문명이 성과를 출발점으로 삼아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p.296
바로크는 먼저 종교 건축에서 생겨나서 가톨릭교회의 감정적인 열망을 표현했습니다. 반면 로코코는 어느 정도 프랑스 파리 특유의 산물로서 자극적이며 세속적입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베르사유의 웅장한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로코코는 고대풍의 정적과 질서 대신에 자유분방하게, 그것도 특히 이중 곡선을 이루어 굽이치는 자연물, 예를 들어 조개껍데기, 꽃, 해초 등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카데믹한 양식에 대한 반동이었지만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지요. 그것은 한껏 발달한 감수성을 나타냅니다. 새롭게 자유로운 연상을 성취했으며, 새롭고 보다 미묘한 뉘앙스를 포착했던겁니다.
--- p.312
사실 괴테의 ‘자연’은 루소의 ‘자연’과 약간 다릅니다. 괴테가 자연이라 할 때는 사물이 어떻게 보이는지가 아니라 간섭받지 않을 경우에 사물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가리킵니다. 그는 직접 식물을 관찰하고 사생할 만큼 뛰어난 식물학자였고, 온갖 생물은 한없이 오랜 적응의 과정을 통해서 최대한 충분히 발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식물과 동물이 서서히 문명화한다고 믿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뒷날 다윈의 진화론이 나왔습니다.
--- p.369
그러한 고갱이 의외로 타히티 섬에 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질 않았습니다. 그가 도착했을 때 타히티는 이미 한 세기 전부터 유럽인이 몰려와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 온갖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끝내 지켜온 고갱의 용기는 실로 영웅적입니다. 그리고 이는 그가 타히티 섬에 살면서 겪었던 갖가지 불결하며 끔찍한 사건을 잊게 해줍니다. 고갱이 그린 〈타히티의 여인들〉은 실로 들라크루아의 〈알제의 여인들〉과 비견할 만한 걸작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오랜 방황, 이처럼 커다란 단념이 필요했다니 도대체 유럽 정신이 어디가 그렇게 잘못되었나 하는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 p.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