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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

[ 저자 친필 사인본 , 양장 ] 트리플-25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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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6월 19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132쪽 | 172g | 116*183*10mm
ISBN13 9788954450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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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영화는 시작되었다.
너의 말에 따라, 나의 반응에 따라,
다음 신이 결정되었다.
--- p.19 「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중에서

나는 친구를 보는 것처럼 텔레비전 속 윤호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 그를, 이룰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랑은 현실과 허구를 경유하면서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 p.29 「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중에서

영화는 너의 얼굴로 끝났다. 훗날, 윤 감독은 인터뷰에서 마지막 컷이 클로즈업이 될 것을 예감했다고 말했다. 한편 나는 영화가 여기서 이대로 끝나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러니까 수민이 세연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걸 확신하게 된 순간 말이다.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 세연의 팔목을 수민이 세게 잡는 것으로, 수민이 세연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영화가 끝나도 되는 건지. 나는 둘 사이에 이야기가 더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수민이 세연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몇 달간의 촬영을 통해 우리가 진전시킨 이야기는 그게 전부였다. 정말로 고작 그게 다였다. 세연은 이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세연도 수민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런 건 영화에 담겨 있지 않았다.
--- pp.36-37 「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중에서

눈부신 빛과 함께, 너는 안으로 들어온다. 너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너를 다시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무슨 말로 대화를 시작하면 좋을지, 나는 미처 준비하지 못했지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입술이 떨어진다. 나는, 그렇게 시작한다. 그렇게 다시 시작하면 됐다.
--- p.45 「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중에서

그 무렵 꿈을 자주 꿨다. 비가 오는 꿈을, 그러니까 비가 오는 날 누군가와 함께 우산을 쓰고 걷는 꿈을 꿨다. 누군가 몇 번이고 내 꿈에 나왔지만, 나는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은 종종 꿈에 나왔다. 그런 사람들은 얼마든지 꿈에 나올 수 있었고, 그건 흔한 일이었지만,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반복적으로 꿈에 나오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반복은 일종의 신호인 것 같았다. 미래에 대한 암시. 예지몽일까. 반복은 내게 어떤 의미를 만들어냈다. 운명적인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 p.55 「이미 기록된 미래」중에서

모든 것은 정보 값이 될 것이다. 그렇게 사라질 것이다. 찍으면 찍을수록, 만질 수 없게 되어버리는 방식으로. 소중히 간직하려 할수록, 사라지는 방식으로. 만질 수 있었던 상은 더 이상 만질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다 타고 남은 재처럼 정보 값만 남긴 채로. 진눈깨비가 재처럼 날렸다. 손이 시려서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필름이 만져졌다. 그것은 작고 단단했다. 아직 무언가 손에 쥘 수 있음이, 그 촉감을 느낄 수 있음이 위로가 되었다.
--- pp.60-61 「이미 기록된 미래」중에서

여기야. 너는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고, 그 부분만 흙이 젖어 있었다. 누가 오줌을 싼 것만 같았다. 우리는 쪼그려 앉아 모종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삽으로 흙을 몇 번 퍼낸 후에는 손으로 파기 시작했다. 손톱에 흙이 끼고 손끝이 아려올 때까지 팠고, 파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리던 손끝에 부드러운 털이 닿았다. 새하얀 몽이, 너의 몽이, 몽이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열심히 흙을 파헤쳐, 땅속에서 그 몽이를 꺼냈다.
--- p.65 「이미 기록된 미래」중에서

그런데 내 기억이 맞나. 개가 따뜻했다고 기억되는 건, 실제로 그랬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상상일까. 상식적으로 개가 부패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날이 추웠나. 겨울이었나. 그래서 땅을 파헤치는 게 힘들었나. 이제 와 돌이켜보니 구멍이 너무도 많았다. 그럼에도 분명히 기억나는 건, 그 애가 손끝에서 피가 나도록 땅을 파헤쳤다는 것이다. 뒷산을 내려왔을 때 나는 그 애 멜빵바지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 손끝에서 난 피를 닦은 모양이었다. 바보 같네. 자기 다치는 줄도 모르고. 나는 그 애 손을 잡았다.
--- p.94 「진입/하기」중에서

그 오빠도, 멜빵바지 애도, 땅에서 파온 개도. 놀이터에 가면 언제든 볼 수 있었던 애들도. 이제 더 이상 없었다. 그들은 이 거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들이 정말 여기에 존재했던 게 맞나. 한때 그랬던 게 맞나. 나는 내 기억을 믿을 수 없었다.
--- p.98 「진입/하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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