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학에서는 대체로 기차로 다섯 시간 이상 소요되는 거리는 비행기를 타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한다. 미국이 철도보다 항공교통에 투자하는 이유다. 그러나 철도교통만의 매력은 그 무엇도 대체하지 못한다. 기차는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탑승할 수 있다. 80세 노인이나 15세 청소년도 혼자 기차를 탈 수 있고, 몸이 불편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글을 모르는 사람도 기차는 쉽게 탈 수 있다. 비행기는 그렇지 못하다. 비행기는 노인과 아이, 가난한 사람, 짐이 많은 사람이 쉽게 이용하기 어렵다. 즉, 교통의 보편성 측면에서 철도가 갖는 장점이 크다 보니 중국처럼 다양한 교육, 생활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야만 하는 사회에서는 철도가 중요한 사회통합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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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여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서호를 즐기는 중국인들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친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인간 사회의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즐거움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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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에서는 기차역에 내리면 모든 사람이 외국인인 나를 주목하고, 내게 뭔가를 팔고 싶어하고, 나를 자기 택시에 (바가지 가격으로) 태우고 싶어했는데 여기 러시아에선 아무도 나에게 신경을 안 쓴다. 괴롭히는 사람도 없지만 먼저 도움을 주려는 사람도 없다. 그것도 나쁘진 않다. 문제는 내가 지금 물 한 병 사 먹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목이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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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들이 겉보기로는 현지인들과 구분이 안 간다. 이들은 그냥 중동에 사는 평범한 중산층인데 경제적인 이유로 유럽으로 넘어오려는 것 같다. 굶어 죽을 위기에 있다거나 핍박을 받았다거나 그런 느낌은 없다. 행색이 초라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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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동안이나 배에 갇혀 있으면 지겹지 않으냐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나로서는 그런 지겨움이 너무나 기대되고 반가울 따름이다. 2개월 11일간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면서 단 하루도 편하게 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크루즈만 타면 천국일 거야’ ‘크루즈까지만 고생하자’ ‘크루즈에서 푹 쉬고 하고 싶은 거 다 하자’라는 생각으로 고생길을 버텨왔고, 이제 그 보상을 받을 때가 됐다. 앞으로 2주간은 철저하게 크루즈에서 시키는 대로 하겠다. 아기처럼 지내자고 다짐한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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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에서 내리면서 안내판에 써 있는 대로 60유로를 냈더니 나이 지긋한 기사님의 눈에 눈물 비슷한 것이 핑 돈다. 그는 나를 쳐다보고 몇 초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더니 “땡큐 베리 머치"라고 말한다. 코로나 이후 크루즈들이 운행을 중단한 동안 그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절절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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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플라잇 세계여행의 콘셉트는 지구의 크기와 인류 문명의 폭과 깊이를 내 몸으로 느껴보자는 것이었다. 중국과 실크로드를 거쳐 크레타섬의 미케네 문명을 보았고, 이제는 미래 문명의 열쇠인 팰콘 로켓까지 보게 되니 나의 목적은 대략 달성한 것 같다. 우리 인간이 어떤 종족인지 이제 감을 대충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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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나도 모르게 위험한 구역에 들어설 수는 있습니다. 주변 분위기가 수상하다 싶을 땐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타인이 나에게 나쁜 마음을 먹을 틈을 주지 않도록요. 선글라스와 야구모자를 써서 내 표정을 들키지 않는 것도 타지에서 마음이 편해질 수 있는 한 방법입니다. 위험해 보이는 장소에서는 다들 조심하니까 사고가 잘 안 나요. 반대로 겉보기에 안전해 보이는 나라에서 경계를 풀고 방심할 때 사고가 많이 터지는 것 같아요. 서유럽에서 소매치기나 좀도둑, 묻지마 폭행 등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잖아요. 인종차별도 있고요. 또 미국 대도시의 치안이 상대적으로 나빠졌습니다. 자동차도 많이 털리고요. 이런 부분은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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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끝나고 누가 물었다. 111일간의 여행으로 내 삶에서 달라진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느냐고. 이젠 한국에서 마주치는 한국 사람들도 다 외국인이라고 생각한다. 길에서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혔을 때, 운전하다가 거칠게 끼어드는 사람을 봤을 때, 어떤 사안에 대해 의견이 충돌할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었다. 하지만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습관의 차이, 문화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화가 가라앉는다. 이제는 타인의 사소한 선행에 더 큰 의미를 두고 더 많은 웃음을 지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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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회사원들만의 세계관에 갇혀서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회사에서 진급을 빨리하는지, 어떻게 해야 성공적인 경력을 쌓는지, 또 회사가 어떻게 돈을 잘 벌 수 있는지와 같은 콘텐츠를 만들고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일로 밥 벌이를 하며 살다 보니 나 자신이 약간은 인간 비즈니스 플랫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던 것 같다. 그것도 물론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지만 여행하는 동안은 그런 ‘회사원 세계관’에서 조금 떨어져 지낼 수 있어서 좋았다. 80억 인류 중에 회사원은 정말 소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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