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그놈의 시절 첫사랑인지 뭔지 죄다 갖다 버려야 일곱 번째 찐 첫사랑이 온다는 말씀?”
“응, 그런 말씀!”
“와, 또 7이네. 이건 정말 예사롭지가 않다, 마이소이!”
“그러니까. 내 말이.”
“좋아. 그럼 마지막 질문은?”
“이건 말하기가 좀 곤란해. 질문이라기보다 무의식 같은 거라.”
“마이소이, 닥치고 불어라.”
“…….”
“어쭈, 네가 아주 오래 살기 싫구나?”
“아, 알았어. 반호준.”
“엥? 누구?”
“반호준이라고. 내 할친손 반호준.”
“그게 질문이야?”
“질문은 아니고 그냥 ‘반호준’ 세 글자를 일곱 번 외우면서 카드를 뽑았다고.”
“오호라. 반호준을 외쳤는데 월드 카드가 나왔다?”
“그, 그런 셈이지.”
“우진 오빠가 연인 어쩌고 하던데, 그럼 반호준이 네 일곱 번째 찐 첫사랑이란 소린가?”
“아, 몰라. 그 자식하곤 말도 섞고 싶지 않다고.”
“근데 왜 반호준이 거기서 나와? 말도 섞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싫은 반호준이?”
“도통 그걸 모르겠어. 질문 세 개 하라고 할 때부터 마지막 질문은 반호준이야, 이렇게 머릿속에 딱 정해져 있었거든.”
--- pp.56-57
“아는 척도 안 하기냐?”
짝다리를 짚은 채 껄렁하게 서서 시비를 거는 사람은 다름 아닌 호준이었다. 징글징글한 할친손이었다.
‘저 녀석, 언제 저렇게 키가 큰 거야? 쳇, 새삼 놀랍네.’
길게 뻗은 호준의 그림자를 걷어차는 시늉을 하며 소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넌 왜 나만 보면 짜증이냐?”
호준이 따져 물었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그러게. 너만 보면 짜증이 나네.”
“어째서?”
“어째서냐니. 반호준, 너 공부 잘하잖아. 수학 문제만 풀지 말고 사람 마음도 좀 풀어 봐.”
짜증이라기보다는 섭섭함에 가까웠다. 2년 넘게 연락 한 번 없더니 여전히 친한 친구라는 듯 저렇게 스스럼없이 구는 걸 보면 더더욱. 게다가 고1이 된 호준은 키도, 성적도, 외모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진로 탐색도 이미 끝냈다고 했다. 겨우 고1인데 자신이 목표한 길을 향해 한 발 한 발 차분히 나아가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니 자격지심까지 느껴졌다. 고1이라면 알 것이다, 뭘 해야 할지 막막한 기분이 얼마나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지.
--- pp.107-108
“아니, 이해가 안 되네. 다 읽어 봤으면 됐지, 안 돌려준다는 건 무슨 심보야?”
“너의 일곱 번째 첫사랑을 위해 그간의 시절 첫사랑 반환 프로젝트에 동참하겠단 뜻이지.”
“뭐? 지금 뭐라고 했냐?”
“A4용지 한 장도 맞들면 나으니까.”
“너 그렇게 한가해? 학원 안 가? 과외는 어쩌고?”
누가 들어도 옹색한 반론이었다.
“뭣보다 너무 즐거워. 오랜만에 활기가 돋는달까. 게다가 방학이라 시간도 있고.”
“그러니까 할친손의 흥미 충전을 위해 나보고 희생양이 되어라, 이 말이냐, 지금? 내가 싫다면? 안 한다면?”
“그럼 뭐, 제일 먼저 소윤이 누나한테 일라인지 이라인지 그 느끼한 바리스타 부분 스캔본을 카톡에 첨부, 그러고는 전송. 투 스텝은…‥.”
“너 진심이야? 난 네가 그 정도로 바닥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진심이야. 그리고 나 치사해. 설득은 반사, 거절은 거절.”
소이의 노트를 백팩에 집어넣은 호준이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당황한 소이가 호준의 팔을 붙잡았다.
“뭐야, 은근슬쩍 팔짱 끼는 거야?”
불에 덴 듯 호준에게서 잽싸게 떨어진 소이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호준을 말렸다.
“알, 알았어. 같이해. 같이하면 되잖아. 이 징글징글한 할친손아.”
--- pp.139-140
버스정류장을 향해 걷는 내내 호준은 뭔가 불만스러운 듯 혼자서만 앞서 걸었다. 소이가 참지 못하고 호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뭔데?”
“헐, 눈치챘어? 나 오늘 잠 한숨도 못 잘 것 같아. 에스프레소 원샷했잖아. 밤에 혼자 깨어 있는 거 너무 싫은데. 무섭단 말이야.”
“뭐라고? 덩치는 산만 한 게!”
“그게 덩치랑은 상관없다고. 책임져, 마소이.”
“내가 왜?”
“너 때문에 마시게 된 거잖아. 결자해지 몰라?”
“대체 어떻게 책임지라는 거야?”
“밤새 통화해. 나 잠들 때까지. 이참에 나머지 첫사랑들 어떻게 정리할 건지 세부안도 좀 짜고.”
“너랑 나랑?”
“당연하지! 너랑 나랑!”
--- pp.190-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