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서울이 1963년에야 지금의 형태를 띠게 된 것처럼, 현재 서울의 역사라는 것도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와 같은 형태를 띤 서울특별시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기에, 〈올바른 서울의 역사〉란 것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 p.28
이제까지 서울을 말해 온 사람들이 조선 시대 궁궐과 왕릉, 양반의 저택과 정자 들을 주로 거론해 온 것은 대단히 편협한 귀족주의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모든 옛 책이 동일하게 귀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서울 속의 모든 공간과 사람도 동일하게 가치 있는 존재들입니다.
--- p.34
양천 향교는 양천구가 아니라 강서구에 있습니다. 사대문 가운데 동대문은 동대문구가 아니라 종로구에 있고요. 옛 시흥군은 지금의 시흥시와는 무관하게 서울 금천구 시흥동이 중심지였고 매동 초등학교는 현재 필운동에 있습니다. 명실상부하지 않은 지명이 많은 것 또한, 서울의 역사가 매우 복잡하다는 사실을 증언해 줍니다.
--- p.37~38
서울의 백제 유적이 파괴된 것은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도 아니고, 임진왜란 때도 아니고, 식민지 시대도 아니고, 바로 우리 한국인들이 정부를 세운 현대 한국 시기였습니다. 현대 한국, 현대 서울에 이렇게까지 유적?유물이 남아 있지 않은 책임의 일부는 바로 우리 현대 한국인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 책임을 회피하면 안 됩니다.
--- p.69
청계천은 오늘날의 서울이 시작된 지점입니다. 청계천 남쪽에는 19세기 말에 일본인들의 신도시가 만들어졌고, 북쪽에서도 〈북촌〉의 원형이 만들어집니다. 1930년대 일본인이 청계천 북쪽으로 세력을 확대하려 하자 〈건축왕〉 정세권은 개량 한옥을 대량 보급해서 일본인 세력의 진출을 저지했습니다. 북촌 한옥은 조선 시대 양반들의 집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 중산층 조선인들의 〈마이 홈〉이었습니다.
--- p.155
1960년대에 청계천 빈민들을 동남쪽 광주대단지로 이주시킨 서울시는, 21세기 들어 또다시 청계천 상인들을 동남쪽 성남시와의 경계 지역으로 보냈습니다. 자신들이 보기 싫은 존재를 서울 경계 지역으로 보내 버려서 눈에 띄지 않게 한다는 심리는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습니다.
--- p.178
1930년대에 공업 지대로서 발전한 영등포는 1936년에 경성에 편입됩니다. 그 후 영등포, 노량진, 흑석동은 〈강남〉이라 불리게 됩니다. 용산에서 남쪽으로 한강 인도교와 한강 철교를 건너면 다다르는 곳이니, 한강의 남쪽인 강남이 맞지요. 지금도 강남 아파트, 강남 중학교, 강남 교회를 비롯해서 강남이라는 단어가 붙은 시설과 업체를 영등포와 그 주변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 p.276
1978년에 인천 서쪽에서 일어난 동일방직 사건과 1979년에 서울 동쪽 끝 면목동에서 일어난 YH무역 사건, 그리고 1980년대에 서울 동쪽의 구리시에서 일어난 원진레이온 사건은 서울 중심부에 충격을 주었고, 그 충격은 이윽고 한국 전체를 뒤흔들게 됩니다. 그 변화의 주인공은 〈아무것도 아닌〉 우리 시민들이었습니다.
--- p.342
키 낮은 단독 주택들과 빌딩들의 군집 속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들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은, 유럽?일본의 성곽 도시와 주변 공간을 연상케 합니다. 그 공간의 중심에 자리한 아파트 단지는, 그 일대의 옛 공간과 주민들에게 위압적으로 근대화, 또는 한국인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근대화를 강제하는 〈혁명군〉이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요.
--- p.372
소수자들을 시민들의 기억에서 지워 버리면서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은, 〈선비〉니 〈양반〉이니 〈사대부〉니 자칭하는 소수의 남성 지배자들이 조선 시대부터 현대 한국에 이르는 시기까지 한반도의 역사를 주도했고, 이들이 주축이 되어 일본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지금도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갈 권리가 있다는 세계관입니다.
--- p.393
이 책의 집필 과정은 곧, 아직 제각각의 정체성이 강하고 서로 간의 관계성이 긴밀하지 않은 서울을 그 전체로서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한 〈나의 서울 순례〉였습니다. 이 책은 제가 지난 40년간 서울을 걸으며 생각한 것을 기록한 〈서울 이야기〉이자, 서울에 대한 저의 생각을 밝힌 〈서울 선언〉이며, 김시덕이라는 인문학자의 〈서울학(學)〉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독자분들께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걸을 때 참고로 하실 수 있는 〈서울 답사 매뉴얼〉입니다.
--- p.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