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 소설에서 인간들이 아닌 다른 요소들, 즉 포경선과 모비 딕 고래 같은 비인간적 행위소들에 더 포커스를 맞춘다면 무엇이 보일까? 에식스호나 피쿼드호 제작에 들어간 소재들과 기술적 요소들, 작살의 구조와 형태, 사냥 방식과 고래들과 맺는 관계에 더 초점을 맞춘다면? 혹은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나무로 만든 엉성한 배를 타고 동물 뼈로 만든 작살만으로 목숨을 걸고 고래사냥에 나섰던 8,000여 년 전 신석기 부족들의 기술과 비교한다면? 그리고… 『모비 딕』에서 나를 포함한 인간종이 바다나 고래와 맺는 관계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읽어낼 단서를 찾게 된다면? 무엇보다 허먼 멜빌 자신이 기묘하게도, 그 소설을 “사악한 예술”이자 “이 세기의 복음서”라고 말했던 그 비밀스러운 동기를 달리 읽어낸다면 무엇이 보일까?
--- 「나의 모비딕을 찾아서」 중에서
한 생물종이 고유한 서식지를 빼앗기는 것은, 인간계로 치면 영토를 빼앗기고 난민이 되거나 완전히 멸절에 이르는 것과 다름없다. 코로나, 메르스, 사스 같은 인수공통감염병이 원래 보균자인 야생동물계를 넘어 인간계로 침투해 들어오게 된 것도 야생동물의 서식지 파괴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관련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다. 인간들이 무분별하게 숲을 개간하고, 나무를 베고, 돈벌이를 위해 동물들을 사냥하면서 삶의 터전에서 내쫓긴 동물들을 매개로 인수공통감염병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를 인간에게 옮긴 주범으로 박쥐가 거론되고 있지만, 실은 인간들이 박쥐를 인간세계로 끌어들인 탓이다. 박쥐는 삶의 터전, 서식지를 잃고 인간 마을로 박쥐-난민이 되어 찾아들어 왔던 것이다.
--- 「서식지」 중에서
인류가 세상에 존재하는 무한하게 다양한 움벨트들의 제각기 다른 아름다움과 경이를 진심으로 느껴 보려 노력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다르게 보일까? 그렇게 된다면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자 유일한 의미의 담지자라는 오만, 인간이 유일한 만물의 척도라는 자만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움벨트들의 민주적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아름답고 경이로운 고래의 멸종을 진지하게 염려했던 멜빌도, 지상을 굽어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않을까.
--- 「혹등고래의 노래」 중에서
만일 내가 밟고 서 있던 공룡 발자국 화석 바위에 잠깐이라도 발을 딛고 서 본다면, 그런 부족주의적 사고가 얼마나 유아적인 과대망상인지 금세 깨닫게 될 것이다. 인간 이전에도, 언젠가 도래할 인간 멸종 이후에도, 우주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 「암각화의 모비 딕」 중에서
브뤼노 라투르는 바이러스와 책, 호수, 폭풍, 유전자, 그림과 도표들 같은 비인간적인 것들이 노동자나 대중시위만큼이나 동등하게 행위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허먼 멜빌이 모비 딕과 피쿼드호 같은 비인간 존재들에게 인간 등장인물들 못지않은 비중과 역할, 서사를 이끌어가는 능력을 부여한 것처럼. 라투르가 비인간 사물들에게도 부여한 ‘행위능력agency’은 그동안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신성한 능력이었다. 이런 생각들은 『모비 딕』을 보는 내 관점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결국 멜빌은 우주적 민주주의를 꿈꾼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 마치 라투르의 철학을 선취하기나 한 듯이, 인간만이 주인이고 나머지 모든 존재는 노예나 사물로 전락해 버린 세계가 아니라 인간과 고래, 포경선, 바다, 육지, 하늘, 그 모든 것이 함께 얽히고 연결되어서 하나의 조화로운 공동세계를 형성하는 생태학적인 세상을 그려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 다시 말해, 그는 근대의 인간 중심주의적 세계의 전복을 꿈꾼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이야말로 멜빌이 자신의 책이 가진 궁극적인 사악함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
--- 「피쿼드호」 중에서
만일 지구 생태 시스템 전체로 확대하여 이 생태 시스템을 파괴하고 교란하고 있는 가장 위험한 생물을 지구의 모든 생물 종들에게 비밀 투표로 뽑게 한다면, 누가 뽑힐까? 바로 사피엔스라고 스스로 굳게 믿고 있는 종, 인간종이 아닐까? 티머시 모턴이 말하는 연대는 특별히 비인간 존재들과 얽힌 공생성과 연대를 가리킨다. 공생적 실재성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정의 속에 깃든 유럽식 개인주의적 개체관을 부정한다. 그 세계관은 인간 존재를 끊임없이 타자들과 분리하는 담장을 세우기에 급급한 세계관이다.
인간과 자연을, 인간과 기계를, 마치 피라미드 쌓듯이 인간을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위계질서 속에서 각기 폐쇄되고 고립된 영역 안에 가두는 방식으로 세상을 그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브루스 매즐리시가 보여주었듯, 그런 피라미드에, 혹은 각기 고립되고 분할된 철창 같은 격자구조에 인간과 자연, 기술을 욱여넣는 것은 하나의 허구에 불과했다. 모든 불연속의 신화는 깨어졌고, 철창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산호와 조류, 송이버섯과 소나무 뿌리처럼 분리 불가능한 상태로 얽혀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연결망의 집합체밖에 없다. (...) 각성한 인류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인간-비인간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겨우 도입부에 들어섰을 뿐이다.
--- 「‘호모 디스터비엔스’, 교란하는 동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