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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

문학과지성 시인선-606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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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7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270g | 128*205*12mm
ISBN13 9788932042978
ISBN10 8932042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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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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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그림자 같다. 짙어지는 어둠 같다. 투명한 밤 같다.
편의점 간판과 유리창, 좁은 화단을 타고 저 끝까지 길게 흐르며 횡단보도 앞에
귀가자를 세워놓은 저녁 신호등처럼
비는,

겨울 공터에 눈사람을 세워놓고

봄 끝까지 길게 흘러온 것 같다.
저녁 그림자처럼

긴 하루의 끝까지 흐르는 사람.
터벅터벅, 걸으면 신호등은 금방 깜빡거리고 잠시 푸르게 물든 사람이다가 꺼지면
검은 나무 같다. 붉게 타는 잎 같다. 그림자에서 자라나는 머리카락. 헝클어진 비 같다.

번지며, 절반쯤은 이미 어둠이거나
깜빡이며 지워지는 얼굴.

[……]

고백하지 않았어. 내가 눈사람이었다
고. 건너편을 지나 비탈 너머엔 집, 저녁을 먹고 빨래를 하고 슬픔도 없이 자고 나면
다시 공장을 돌리러 갈 시간이거든.
---「눈사람에게 공장을 돌리게 하자」 중에서

고래를 보자 나는 알아버렸네. 슬픔은 신이 자신을 그리다 망친 그림이었다.
화요일을 월요일로 만들기 위해 수요일의 바다를 찢으며 헤엄치고 있었다.
물 밖에서만 숨 쉴 수 있는 고래는
물 안에서만 먹을 수 있는 고래는
우리 사이에서 뽑혀 나간 못 자국을 두 눈으로 뜨고, 한 칸의 부러진 사다리처럼

바다를 떠다니고 있었다. 물에 젖은 종이와 물에 풀린 물감과 마침내 물에 불은
자화상이 가라앉는 것처럼

많은 이야기를 잊었지. 신을 예배당 첨탑에 가두고 쉬는 날에만 깨워서 일을 시켰어.
마침내 기도라는 언어를 발명했지. 그것은 토요일의 시인이 일요일에 신이 된 이야기.

서로를 보자 나는 알아버렸네. 사랑을 만들기 위해 신은 인간이 필요했다.
그에게는 늘 이별이 부족해서 여전히 자신의 전능이 인간의 슬픔인 줄 몰랐다.
사랑 안에서만 믿을 수 있는 우리는
사랑 밖에서는 믿을 수 없는 우리는
수요일에 끝나는 이야기가 있어서 썰물을 등지고 돌아섰다.
비명을 기도 속에 남기고 인간에게는 늘 기적이 부족해서 누구나 자신의 삶이 슬픔의 종교란 걸 알았다.

사랑해. 다른 사람에게 말해도 같은 목소리가 재생된다. 세상의 모든 전화기는 전염병을 앓고 있고 지금 그것은 우리 손안에 있다.
---「수요일의 주인」 중에서

할인 마트 간판에 불이 켜지는 시간,
종말 후에도 남아 있을 진열장 꽁치 캔을 쓸어 담는 생존자의 위태로운 눈빛처럼

누군가 인간을 촛불처럼 켜놓고 둘러앉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곧 인간을 끄고 박수를 칠 차례인지도 모릅니다

한 조각씩 잘라낸 인생을 빵칼로 덜어낼 때, 접시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발밑에서 그림자는 개 같습니다 할인 마트 간판에 불이 켜지는 순간을 기다려 달려오는 개, 식탁 아래에서 제 몫의 접시를 핥기 위해 붉은 혀를 늘어뜨린 개 인간이 닳아가는 시간을 보여주기 위해 세계를 물고 놓지 않는 개

불러봅니다,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등을 쓰다듬으며 이름이 뭐야? 물으려던 것뿐인데
어둠이 붉은 잇몸을 당겨 올린 것처럼

흰 송곳니, 묽은 침을 뚝뚝 흘리며

어김없이
할인 마트 간판에 불이 켜지는 시간이면 나는 냉동육과 가족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빵 봉지와 몽유병을, 차곡차곡 엎어놓은 양은 냄비와
클랙슨 소리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불빛에 흔들리는 인간이 한 블록 지나 꺼지고
흰 연기가

아무렇게나 붙여놓은 바코드처럼 어둠 속에 잠시 제 영혼을 찍어놓고 사라질 때
종말 이후의 생존자가 꽁치 캔을 따는 순간처럼, 와르르르 무너지는 진열장처럼

할인 마트 수북한 선물 상자 속에 봉합된 개 짖는 소리를 컹컹, 마음의 둥근 접시에 옮겨 담으며
나는 입속의 흰 송곳니를 뾰족한 그리움으로 감추며 으르렁거리듯 당신의 이름을 중얼거립니다
---「미래 중독」 중에서


하나를 주고
내 산책을 가져가는 시간을 만난다

돌, 그것이 오후라는 듯이
돌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걸으면

그것이 마음이라는 듯이,
데워져

아무래도
돌에게 빼앗긴 게 있는 것 같아

버리지 못한다, 돌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불을 켜고 바라본다
내 몸에서 잠을 꺼내 뭉쳐놓은 것 같아서

내 잠에서 꿈을 꺼내 뭉쳐놓은 것 같아서

돌을 쥔다, 마음이 다 건너갈 때까지
물컹해질 때까지 벌겋게 뛸 때까지
이 도시엔,

밤을 뭉쳐 돌을 만드는 시간이 있고, 쥐고 있으면

슬픔을 빼앗긴다
---「광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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